나는 누구에게 '언니'라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 뭔가 간지럽기도 해서 막 친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특히 잘 쓰지 못한다. 그래서 알고 지낸 지 오래되어서야 언니라고 부르게 된 사람이 있다. J였다. 언니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 당시,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썼다. 애석하게도 J는 샘플4와 내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그렇게 셋이 만났다. 술을 곁들이는 그런 자리였다.
한 시간도 넘는 거리를 퇴근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그들을 만나러 갔다. 그만큼 나에게는 기대되고 자리였고, 즐거웠어야 하는 자리였다. 샘플2와 샘플3의 일을 한꺼번에 겪고, 그것을 해소하거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감정의 소용돌이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한 것이 샘플4였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나와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증거였다.
그녀에게는 정말 가감 없이 모든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위로도 해주고, 분노도 해 줬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가 변한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이 만남을 앞 뒤로 해서였다.
어쨌든 만났다. 즐거운 이야기, 속 터지는 이야기,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들을 신나게 했다. 주로 일하면서 힘들었던 얘기들과 샘플2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J가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왜 아직도 존댓말을 써? 오래 알지 않았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위원장님이시잖아요~"
그렇다. 샘플4는 내가 모시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직 서로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고 혹시나 풀어졌을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역할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예의를 지키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더구나 내가 모시는 상황에서 쉬이 말을 놓자고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나이 역시 그녀가 더 많았기에 그런 행동이 무례할 수 있다고도 판단했다. 물론, 말을 놓으면 참 편하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내 말과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우린 업무적인 관계잖아요."
그랬다. 우린 그냥 업무적인 관계였다. 나와 그녀의 대답은 참으로 비슷했지만 달랐다. 그 말에 서운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왜 이 업무적인 관계를 위해 퇴근하자마자 부리나케 멀리까지 달려온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 대화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J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이지만 그녀는 샘플3과도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사이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만은 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분명 복장 터지는 일이지만 전달해야 할 내용은 아니었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샘플4가 이런 말을 했다.
"또 할 얘기 있잖아요."
아니다. 나는 할 이야기가 끝났다. 더 이상 해야 할 말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건 내가 J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고자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행동이었다. 나는 일부러 "네? 뭐요?"라고 말했다.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어적인 신호였고, J에게 보이지 않게 손짓과 눈빛을 샘플4에게 날렸다. 그러자 그녀가 "그거 있잖아요, 그거."라며 쐐기를 박았다.
이런 상황까지 오니 어쩔 수 없이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까지 해야만 했다. 적당히 덜어내고 적당히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샘플4가 말을 덧붙여서 그럴 수도 없었다. 나의 신호를 못 알아들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물 먹이려고 그랬던 것일까? 수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술자리로 끝내려고 그 자리에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괜히 따돌림당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를 J에게 도리어 미안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돌아가야 할 버스를 타야 했다. 단 몇 시간을 만나려고 시외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 한 나 자신이 살짝은 한심하다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J만 만날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헤어지는 순간 우리는 다음엔 방을 잡아서 밤새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정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샘플4는 대체 왜 그랬을까? 무슨 생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