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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로 Apr 11. 2021

근로자의날

샘플 3-17

(근로자의날인가 노동절인가에 대한 문제는 뒤로 두고)


이 곳은 5월 1일이 쉬는 날이 아니었다. 그 날은 쉬는 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나다. 우리도 엄연히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자원봉사자처럼 혹은 희생을 해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샘플3에게는 이것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매년 그 시기가 되면 일종의 눈치싸움을 해야 했다. 그래서 나와 다른 동료는 그 시기쯤에는 일부러 업무 일정을 만들지 않았다. 쉬어도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샘플3은 금요일이나 월요일에 쉬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 해의 근로자의날이 금요일이었다. 빨간 날로 하자고 말했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날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냐고 물어봤지만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근로자의날인데 쉬어도 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이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거절이었다. 나의 제안은 거절되었지만 다른 동료는 집안일 때문에 쉬겠다고 하자 허락되었다.


그날 저녁 근로자의날에 쉬게 된 남자 친구가 사무실에 찾아왔다. 단체의 구성원이기도 하고 퇴근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사무실에 혼자 있었기에 잠깐 들어와 있으라고 했는데, 샘플3이 나타났다. 샘플3이 남자 친구와 마주칠 때마다 아니꼽게 쳐다보고 인사도 안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깐 내려가 있으라고 했다. 퇴근이 약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무언의 거절이기는 했지만 근로자의날에 쉬는 부분에 대한 명확한 답을 듣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물어봤다. "우리 다 같이 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랬더니 샘플3이 말했다.

"남자 친구 데려다 놓고 그런 얘기하면 남자 친구랑 쉰다는 거잖아."


어이가 없었다. 내가 쉬는 날 집에만 있든 남자 친구랑 놀라가든 그것은 샘플3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남자 친구랑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때문에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남자 친구가 사무실에 있었던 것이 기분 나쁠 이유는 없었다. 우리 사무실은 구성원들 누구나 편하게 다녀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샘플3의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내가 쉬는 날 무슨 일을 하는 게 쉬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며 입 밖으로 내뱉고 쉬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또 입을 다물었다. 대꾸조차 하지 않는 것에 더 화가 났지만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나와서 일하는 것이야 그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집안일이라서 쉬는 것이 가능한 다른 동료와 남자 친구와 함께라서 안된다는 그 기준은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사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지만 정말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퇴근시간이 다가와서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자 샘플3은 내일 쉬어도 되지만 다음부터는 쉬기 전 날 말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 근로자의날에 쉬는 것은 몇 년 전부터 해 온 일이었고 이미 며칠 전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듣고 싶지 않아서 귀를 닫았을 뿐이었다.


돌아오지도 않을 이야기를 외친 지 오래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렵사리 돌아왔다고 생각한 메아리가 악취를 가득 머금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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