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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로 Apr 15. 2021

교육과 차량

샘플 3-18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중에 유아들과 함께 하는 것이 있다. 차를 타고 가는 것이라서 보험을 들면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2018년 9월부터 만 6세까지 카시트가 의무화된 것이다. 관광버스는 예외규정에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유치원이 감수하고 간다면 법적인 문제는 없기 때문에 태우고 가도 상관없다는 쪽이었고, 샘플3은 우리의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운행하면 안 된다는 쪽이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그는 "법이 문제냐."라고 했고, 법이 이상하게 바뀐 것이기는 했지만 안전에 조금이라도 신경 써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매우 동의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유치원에 알려야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전화를 해야 할지 정해야 했다. 해당되는 모든 유치원에 같은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샘플3은 그런 내용은 정하지 말고 우선 전화를 해 보자고 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어떻게 할지 정하지 않고 전화를 하면 오히려 혼선이 생길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올 때까지 전화를 하지 않고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 돌아온 샘플3에게 "결정하고 전화해야 한다."라고 말하자 돌아온 대답은 "난 몰라 알아서 해."였다.


해당되는 곳은 네 곳이었다. 내가 생각한 전화의 순서는 이랬다.

1. 전화를 건다.

2. 우리가 대여한 버스가 카시트가 없음을 유치원에 알리고 사과를 한다.

3. 혹시 다른 유치원처럼 자차를 사용할 수 있는지 묻는다. 아니라면 실내 프로그램 등 다른 프로그램을 제안해 본다.

4. 자차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면 죄송하지만 프로그램 진행이 어렵다고 다시 한번 사과를 한다.

이렇게 하면 사과도 가능하고 상황도 설명이 되고 대안도 이야기해 볼 수 있게 된다. 유치원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한 번에 전화는 안 끝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샘플3은 죽어도 카시트가 없는데도 갈 것이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이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데리고 가도 되는 것이 아니냐고 했던 나의 주장이었다. 나는 나의 주장을 굽혔고 우리가 결정한 것은 데리고 가지 않기로 한 것임에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전화의 순서는 이랬다.

1. 전화를 건다.

2.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한다.

3. 카시트가 없음에도 차량을 이용할 것인지 묻는다.

대답 후,

4-1. 안 되겠다고 하면 사과한다.

4-2. 그래도 하겠다고 하면 그래도 우리가 안된다고 한다...?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시점에서는 유치원에 카시트가 없는 차량을 이용할 선택권을 주면 안 된다. 그게 상식적이라고 생각했다. 하겠다고 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안된다고 한다면 그것 유치원의 입장에서는 '어쩌라는 거지?'라고 마음이 들게 뻔했고, 나쁘게는 농락한 꼴이 되어버린다.

이런 답답한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언성을 높였다. 언성을 높인 것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상하게도 샘플3이 이 대화에서 화가 난 부분은 '내가 언성을 높인 것'이었다. 오롯이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사실 언성을 안 높이기에는 그가 말을 너무 못 알아들었다.

나는 샘플3에게 물었다. 왜 그들이 선택하지 못할 것에 대한 것을 물어야 하냐고, 그것은 아니지 않냐고.

그랬더니 대답은 전화를 한 번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어서 이야기하길, 그쪽에서 기껏 신청했는데 전화를 한 번만 해서 '너희 신청한 거 안됨'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동의했다. 그래서 계속 말한 것이 내가 주장한 전화 방식이었던 것이다. 앞선 대화에서 나는 대체 누구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과를 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기본적인 것이 아닌가? 이런 기본적인 것은 한참 전에 정해졌고, 그다음의 상황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 샘플3은 아직 앞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샘플3에게 당신이 우려하는 것은 당연히 할 것이고(아까 다 정해진 것이었고), 지금은 그 뒤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럼 그렇게 하자고 했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하니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유치원들도 그 상황을 알고 있었어서 다행히 기분 나빠하는 곳이 없었다. 샘플3이 하자는 대로 했다면 거의 농락에 가까웠을 테니 참 다행인 일이었다. 


기본적인 대화조차도 잘 되지 않는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도 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열은 나만 받은 것일까? 왜 나는 화가 나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에게만 자꾸 되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이 싫어서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다른 동료는 무슨 극한직업을 가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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