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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로 May 05. 2021

괜찮다는 말

샘플 3-30

걱정이 되는 것이 있었다. '왜 이제 와서'라는 말이었다.


많은 시간을 참고 버텼다. 버티다 버티다 힘들어졌고,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점점 사라진 상황에서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혹은 다시 버틸 힘을 찾기 위해 상담센터를 찾은 것이었다. 그런데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보고 나의 상태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은 깨닫게 되었다. 우울지수가 굉장히 높아서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은 덤이었다. 되돌아보면 버틸 힘을 찾기 위해서라는 마음도 바보 같았다.


선생님께 걱정을 말씀드렸다. 왜 몇 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할까 봐 두렵다고. 나의 이런 감정과 두려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막막하고, 설득할 수는 있을지도 의문이라고도 했다.


괜찮다는 말. 너무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많은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에 대해서 나중에 인식하고, 나중에 공포감을 느끼고, 나중에 문제의식을 갖는다면서 아주 일반적인 일이므로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내가 이상한 것일까, 내가 과민한 것일까 스스로 되뇌기를 여러 번이었는데, 타인에게 이상한 게 아니고 그런 감정을 갖는 것이 괜찮다는 말을 듣는 것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왜 샘플3과 그들에게 나의 감정을 설명하느냐고도 하셨다. 오롯이 나를 위한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고 했다. 그걸 참으로 못했다. 피해가 있었던 시점에서부터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어야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상담이 끝나고 나오면서 선생님의 센터 뒤에 있는 산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을 추천하셨다. 무기력함에 육체적인 활동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신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언덕을 오르고, 처음 보는 풍경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해줬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의 이런 감정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괜찮다. 괜찮은 것은 내 착각이 아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멀리서 비 냄새가 나서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면서 비가 왔다. 비 오기 전에 나는 냄새를 잊고 지낸지도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사랑하던 수많은 감정들을 되살리고 싶었다. 오래간만에 맞는 비가 마음의 무언가를 씻어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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