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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로 May 10. 2021

만류

샘플 3-33

샘플3은 자신의 퇴직 의사를 느닷없이 던졌다. 다음 해의 사업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의견을 내지 않고 꽁해 있는 그에게 의견이 뭐냐고 물었더니 나온 이야기였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저는 그만둘 거니까 내년도 사업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공간 분리를 요청한 지 채 하루가 되지도 않았는데 내려진 결정이었다. 내가 고민하고 걱정했던 그 시간마저 뭉게 버리는 통보이기도 했다. 그만두겠다고 말한 이유 자체가 내가 공간 분리를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샘플3 자신도 오랫동안 고민해왔다고 했다.

오랫동안 고민한 사람이라면 나와 우리에게 그러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행동하고 말하면서 한 번쯤은 더 고민하고 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랜 고민을 하고 한 결정이라는 것에 실소가 나왔다. 물론 예언을 하듯 샘플3의 행동을 맞춰버린 상황이 되어 동료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그만두라고 했나요? 왜 그만두신다고 하나요? 누구한테 뒤집어 씌우려고."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샘플3에게 그만두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었다. 동료 역시 그만두는 게 최선이냐는 질문을 했을 뿐 그만두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소통이 되지 않았던 것, 은근히 괴롭혔던 것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실 샘플3의 행동을 예상하면서 함께 이야기했던 것이 있다. 우리가 붙잡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리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거였다. 하지만 현실에선 우리 누구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샘플3의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누가 봐도 당황함이 역력했다. 그래도 준비한 말을 해야 했는지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부터 조직의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두 분이 허락해 주신다면 다른 일을 찾을 수 있게 6월까지는 일을 하지 않아도 급여를 받고 싶습니다."


우리가 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만두는 것에 대해서는 운영위원회에서 보고해야 했고, 일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급여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해야 할 일이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재정상황에서 선뜻 그렇게 하자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샘플3은 그것을 긍정의 대답으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샘플3은 그만둔다고 말했지만 관련된 후속작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대표나 운영위원회에 이야기하지 않았고, 사직서도 제출하지 않았다. 말만 그만둔다고 던졌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고, 때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 K님께 전화를 받았다. 사무실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우선은 전화를 끊고 샘플3이 외출한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왜 그러시냐고 묻자 K님은 샘플3과 통화를 했다고 하셨다. 다른 일 때문에 전화한 샘플3이 갑자기 힘들어서 그만둔다는 말을 했다고. K님은 그 말을 듣고 유쾌하게 "나도! 나랑 같이 그만두자!"라고 하셨다고 한다.

정말 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샘플3은 한치의 예상에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그의 퇴직을 만류하지 않자 여기저기 전화해서 '만류할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해줄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간의 이야기는 한 톨도 하지 않은 채였다.

한바탕 웃은 뒤 K님에게 그간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아니 아주 간단히 압축해서 이야기했다. 울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눈치도 채지 못했다며, 그간 고생했겠다며 본인의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섣불리 위로하지 않겠다는 K님의 말은 지금껏 들은 말 중에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이런 어른도 있다는 것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 뒤로도 '그만두려는 샘플3'에 대한 연락을 꽤 받았다. '그만두는 것을 결심한 샘플3'이 아니었다. 즉, 그는 우리에게 그만둔다는 말을 던졌으나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자 말려줄 사람을 찾아서 그만두지 않아야 할 핑계와 이유를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샘플3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전후 사정을 듣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그래 그만 둘 때도 되었지."가 일반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우습게도 이런 이야기들은 나에게 다 전달되어 들어왔다. 이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싶으면서도 결국 샘플3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수습을 또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샘플3은 그만둔다고 말한 뒤 마음이 편해진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그만둔다는 자신을 말리는 사람이 없자 사무실에 점점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한결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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