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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조성 강사 라라 Dec 20. 2019

03 변하고 싶은데 변하기 싫다

상담 이후의 혼란


"우울이 정말로 지겨워야 낫는다."

 한참 우울로 고통받을 때, 도움을 주신 선생님이 반복해서 해주신 말이었다.

‘정말로 지겹고 정말로 벗어나고 싶은데... 누구도 이 끔찍한 상황에 머물고 싶지는 않을 텐데 왜 자꾸 얘기하실까?’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변하고 싶다는 의지를 활활 불태우며 상담을 시작된 후 나는 거의 매 회마다 ‘변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나를 마주해야 했다.

 

 지긋지긋한 무기력이 정말 싫었지만, 무기력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는 건 엄청나게 어려웠다.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과거의 상처들을 마주 하는 건 너무 고통스러웠다. 부모님과 얽힌 감정에서 정말 벗어나고 싶었지만, 부모님에 대한 온갖 감정을 들여다보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매 상담 때마다 상담을 가고 싶지 않은 엄청난 저항이 일었고, 상담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그 모든 순간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우울이 지겹지 않고는 넘어가기 힘든 순간들이었다. 내 삶에서 일어난 일들을 원망하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탓하며 슬퍼하며 사는 것이 차라리 쉬운 일이었다. 원망하고 탓하고 부정하고 싶은 모든 일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수용하고, 누구의 탓도 하지 않으며, 내 삶을 좋은 방향으로 선택해가는 건, 죽기 대신 살기로 결심한 벼랑 끝에 선 각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할만큼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힘든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인생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없어지고, 탓하고 원망할 사건도 사라지고, 그로 인해 슬프고 아프고 비통한 감정도 사라지면, 그럼 이제 나는 누구일까? 나에게 전혀 이롭지 않았더라도 나를 구성하고 있는 감정과 사건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될수록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혼란이 커져갔다.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이 옳지도 않았고, 틀리고 나쁘다고 판단했던 것들도 더 이상 나쁘지만은 않았다. 삶을 살아가는데 기준이 되었던 모든 것이 뒤집어지자 가치관의 혼란이 왔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는 대혼란.

 결국 나는 하나하나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야 했다. 다시 청소년기로 돌아가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처럼 사람과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고,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하나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가야 했다. 상담을 받으면 좋아질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인생을 뒤흔드는 가치관의 전복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변화는 편안하지 않다. 살던 대로 사는 타성에서 벗어나는 건 작든 크든 저항감이 따른다. 하지만, 살던 대로 살면, 살던 대로 살게 된다. 정말로 변하고 싶은 마음만이 저항을 뚫고 익숙함을 버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준다.

 



 상담이 종료될 무렵. 조금씩 줄여가던 우울증 약을 드디어 끊게 되었다. 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삶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신기하고 신나는 나날이었다. 꾸역꾸역 저항을 뚫고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이제부터는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같이 든든했다. “그렇게 우울에서 벗어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 주인공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같은 결말이 난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아무리 치유작업들로 건강해지고 방향을 전환했다 하지만, 30여 년을 넘게 반복했던 부정적인 생각들과 우울한 감정은 너무나 익숙했다. 열심히 노력하고 가꾸면 나름 긍정적이고 편안한 감정일 수 있었지만, 무의식 중에 언제든 어느 때든 부정적이고 우울한 내가 튀어나왔다. 정말 모든 게 서툴렀다. 이전의 나처럼 반응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새로운 변화된 나의 모습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평생 오른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다가 왼손으로 서툴게 젓가락질을 배워가는 느낌이었다. 답답했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방법은 익숙한 오른손을 내려놓고 서툰 왼손을 다시 내미는 수밖에 없었다. 왼손이 익숙해질 때까지 언제까지고 반복해서.


 한 번은 모임에서 누군가의 말에 화가 났었다. 무의식적으로 화를 참고, 화가 난 걸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화를 내지도 못했던 패턴은 나의 핵심 상담주제였다. 상담을 통해 화를 표현해야 하는 걸 배운 나는 그 날 드디어 화를 냈다. ‘이건 분명 화나는 상황이 맞고, 나는 내가 화났다는 걸 알아차렸어! 나는 내 편이 되어줄 거야! 내 감정을 존중해줄 거야! 그러니 나는 화를 내도 돼!!!’

 결과는 처참했다. ‘건강하게’ 화를 표현하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다. 마치 어린 꼬마가 되어 처음 글씨를 배우는 것처럼, 모든게 엉망진창인 느낌이었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있다. 한 번도 화내지 못하던 내가 과거의 나를 부정하며 화를 내기로 방향을 전환한다. 거칠고 불건강하게 마구 화를 내는 경험 끝에 그런 식으로 화를 내지 않기로 다시 방향을 전환한다. 두 번의 전환의 결과 ‘화를 참지도, 화를 폭발하지도 않는’ 나로 균형 있게 성장한다. 성장은 이렇게 두 번의 부정을 거쳐 완성된다.

 변화의 시작은 반대 극으로 가게 된다. 나처럼 참고만 살다가 감정을 마구 표현하거나, 너무 표현이 컸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 표현도 없게 되는 등 반대 극으로 움직여 균형을 잃는 시간이 반드시 존재한다. 다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계속 나아가는 것.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것.

(그 후로 수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건강하게 화를 내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상담을 통해 배운 ‘건강한 삶 살기’ 기초훈련은 일상에서 번번이 무너지곤 했다. 나의 감정과 욕구를 배려해주어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는데,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0.5초 만에 무의식 중에 일어나지만, 나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은 매우 의식적으로 매번 기억해내야 했다. 빠르면 몇 분 후, 때로는 며칠 후에야 내가 무의식 중 상대를 배려하고 나의 감정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또다시 자괴감에 빠져들곤 했다.

 한 번은 평소 불편해서 만나지 않는 친구와 일부러 약속을 잡았다. 그 친구와도 건강하게 잘 대화하는 달라진 나를 확인하고 싶었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나는 여전히 그 친구 앞에서 편안하게 말하지 못하고, 눈치 보고 위축되어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기분이 처참했다. 내가 생각한 것만큼 아직 건강해지지는 않았다.  


 어느 날 태생부터 건강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상한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아 성격도 좋고, 구김도 없고, 능력도 좋아서 하는 일마다 순조로이 잘 풀리는 친구. 나의 기나긴 우울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해주지만, 나의 절망을 이해할만한 힘든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그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날. 집에 돌아와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왜 나는 어릴 때 그런 일을 겪어서... 왜 나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왜 나는 이런 힘든 성격으로 사느라.... 왜 나는 이 많은 상처를 치유하느라.... 여전히 서툴게 건강한 삶으로 옮겨가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그 친구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내가 다다르고 싶은 그곳을 이미 누리고 있는 게 너무 억울했다. 내가 또 가까스로 노력해서 그곳에 다다르면, 그 친구는 또 나보다 더 멀리 가있겠지. 스타트라인이 다르기에 결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너무 분했다. 나의 모든 상황이 너무 싫고, 그동안 노력했던 모든 것들을 다 내팽개치고 싶은 분노가 일었다. 그렇게 억울함에 꺼이꺼이 울던 중 안에서 질문이 올라왔다.


그래서 어쩔 건데?


 그래. 스타트라인이 달라. 네가 아무리 쫒아가도 그 친구는 너의 앞에 있을 거야. 네가 그토록 노력해도 갖고 태어난 그 친구의 반도 못 쫓아갈 거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경험해야 했던 너의 불행한 과거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래서. 어쩔 건데? 여기서 Stop이야? 아님 계속 Go야?


 순간 내가 얼마나 순도 높게 못난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내게 주어진 것들을 원망하고 서러워하고,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질 수 없어 억울해하는 것 역시 내가 무의식 중 반응하는 익숙한 감정들이었다. 익숙한 억울함에 빠져드는 대신 나는 지금 나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는 게 맞다. 바꿀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서러워하고 우는 대신, 내가 바꿀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엉엉 울다말고 정신이 번쩍 들어 울음을 그치고 (여전히 서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대답했다.


‘Go’


 나는 평생 그 친구의 반도 못 쫓아갈지도 모른다. 나는 평생 노력해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뒤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열심히 치유를 하고 나를 다독여도, 평생 상처 없는 사람이 자유로이 누리는 것의 반의 반도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에게 유리한 선택은, 이대로 세상과 삶을 원망하며 우는 대신 나 자신을 위해 뭐라도 한발 앞으로 내딛는 것이다.


 그 날 이후 나의 ‘억울해’ 레퍼토리는 생명력을 잃었다. 더 이상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 원망할수록 힘만 빠지고 서럽기만 하고 나에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과 생각들이라는 걸 선명하게 깨달은 만큼, 그 날 이후 다시는 '원망'의 카드를 꺼내 들지 않았다.  





 긍정:부정이 10:90의 비율로 우울했던 내가 긍정으로 옮겨가는 처음은 정말로 어려웠다. 너무 어려워서 그냥 다시 살던 대로 살고 싶을 만큼. 하지만, 20:80, 30:70이 될 정도까지만 버티고 연습하면 일단 얼추 살만해진다. 그 이후는 탄력을 받아 좀 더 수월하게 50:50까지 만들 수 있다. 100% 변하기를 목표로 잡으면 도저히 갈 수 없지만, 초반의 10:90을 30:70까지 만들 때까지만 잘 버티면 그다음은 조금만 노력해도 갈 수 있다. (100%까지 갈 필요도 없고 갈 수도 없다는 건 50:50을 넘으면 곧 깨닫게 된다. )


 알지만 잘 안 되는 것들이 되게 하려면, 될 때까지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이 좀처럼 편안하지는 않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를 원하지만 ‘아는데 안돼서 답답해요’ 단계에서 포기한다. 내가 그 단계를 넘어갈 수 있었던 건 ‘우울이 정말로 지겨웠던’ 절박함이었다. 그 경험 덕에 나는 지금도 변화를 원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10:90에서 넘어가기 힘들어하는 이들에겐 이 단계가 가장 힘드니 조금만 힘내라고, 그래도 변화하기로 마음먹은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변화하고 싶지만 여전히 용기를 내지 않는 사람들에겐, 지금 억지로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안심시켜준다. 변화로 넘어갈 수 있는 ‘절박함’을 주는 일들이 그들의 삶에 일어날 테니까.

나에게도 그랬듯 삶은 언제나 완벽하게 우리를 안내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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