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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조성 강사 라라 Dec 25. 2019

04 나를 사랑하기 훈련

칭찬감사일기

 하루에 나에 대한 칭찬 50개, 나에 대한 감사 50개 쓰기.


상담과 동시에 참가한 치유모임 첫날 받은 과제는 상당히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내가 뭘 칭찬받을 게 있다고 50개나 칭찬을 해줘! 실수하고 바보 같고 제대로 못하는 게 훨씬 더 많은데!’

 과제를 받는 순간 바로 마음에 반란군 세력이 들끓었다. 나 자신에 대한 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에게 감사하고 타인에게 감사하는 건 익숙하지만, 나 자신에게 감사하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신개념이었다.


  정말로 나아지고 싶은 간절함이 없었더라면 마음의 격렬한 저항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이대로 살지 않으려면 뭐든 해보는 수밖에 없다며 꾸역꾸역 과제에 도전했고,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고 강력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나는 극도의 자기혐오와 학대에서 자기 사랑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먼저, 50개씩 칭찬할 것을 찾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나의 모든 행동을 샅샅이 관찰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나를 타인을 보듯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게 되었고, 남 보듯 나를 보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칭찬해줄 일이 많았다. 그동안 두려움을 이기고 도전했을 때에도, 어려운 일 차분하게 마무리했을 때도, 큰 일을 해냈을 때도 ‘이 정도 일이 칭찬받을 거라고...’라고 생각하며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남 보듯 보기 시작하자 그 당연함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칭찬해줬을 것들을 왜 나 자신에겐 한 번도 안 했던 걸까?

 어색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했던 칭찬 말을 똑같이(사실은 훨씬 무뚝뚝하고 어색하게) 나에게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글거리고 불편하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는데, 그닥 살갑지도 않은 칭찬의 말로도 안에서 무언가 몽글몽글한 반응이 올라왔다. 매일 칭찬이 반복될수록 점점 더 신이 나기 시작했고, 자신감이 생기고, 뭔가 더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생겼다. 잘한다 잘한다 할수록, 내가 정말로 잘하고 있다는 믿음도 생겨났다. (물론 초반에는 나 혼자 뻑가서 우스워질 거란 반란군의 아우성도 강력하게 따라붙지만!)


 칭찬으로 신이 나다 보니 어느새 걱정, 두려움, 혼란 등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빠지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아무리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해도 잘 되지 않았었는데,  하루 종일 칭찬할 것과 감사할 것들을 찾다 보니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부정적인 생각이 줄었다. 줄어든 만큼 점차 안정을 찾고 편안해졌고, 칭찬과 감사의 말들이 서서히 일상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래도 하루에 100가지나 칭찬하고 감사할 거리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칭찬할만한 행동들을 다 적고도 모자르면 ‘이를 닦은 나를 칭찬해’, ‘손톱을 깎은 나를 칭찬해’ 등 당연한 일상까지 샅샅이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나의 모든 당연한 일상이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도, 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음식을 소화시키는 것도 모두 당연하지 않았다. 일상은 매 순간이 놀라운 기적이었고, 그 기적이 나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회색빛이었던 일상이 화사한 컬러로 변하는 것 같은 충만함이 몰려왔다. '나는 고쳐야 할 것 투성이의 문제 많은 존재'라는 생각도 서서히 바뀌어갔다. 나는 부족하지도 않고, 잘못된 존재도 아니며, 오히려 가진 게 정말 많은 풍요로운 존재였다.  


 칭찬과 감사를 100개씩 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상의 소소함까지 칭찬하고 감사하고도 다 채우지 못하면, 그 다음은 내 존재에 대한 칭찬과 감사로 넘어갔다.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나의 열손가락과 감수성, 발볼이 넓어서 구두를 신지 못하는 네모난 발, 정작 나는 관심 없지만 남들은 부러워하는 큰 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친절함과 상냥함, 옷살 때 특별히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사이즈의 몸....

 나의 몸과 나의 타고난 성격을 칭찬하고 감사할수록, 반대로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내 몸과 내 성격, 내 행동들을 저주하며 살아왔는지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나 자신을 미워하고 협박하고 몰아붙였는지... 그렇게 하면서도 스스로 얼마나 잔인한지 몰랐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말들과 못된 행동들을 나에게는 매일매일 해왔었다니!


 무엇보다 칭찬 감사일기를 쓰며 얻은 최고의 깨달음은 ‘타인에게 대하는 태도가 나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나는 주로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순간 날카로운 독설을 내뱉을 때가 있었다. 나조차 당황스러운 그런 모습을 행여나 들키지 않으려 긴장하고, 더 친절하고 상냥하려 애썼다. 그런데 칭찬감사일기를 쓰다 보니, 나 자신에게 했던 독설과 깎아내리는 말들무의식 중 타인에게도 튀어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으니, 애써 조심하지 않아도 타인에게도 자연스럽게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되었다.  

  또 나는 평소 타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 칭찬 중 일부는 정직하지 않았다. 그냥 상대가 칭찬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칭찬해주면 적어도 나를 싫어하지 않을 것 같아서 칭찬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나를 칭찬해주는 것이 익숙해지자, 타인에게 하는 칭찬은 더 섬세하고 진심이 가득 담기게 되었다. 내가 밥 먹고 소화시키고 똥 싸는 것도 이쁘고 기특하고 행복해지니, 타인도 똑같이 그저 존재만으로도 이쁘고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런 감사하고 기쁜 마음에 어떤 목적도 없이 사랑을 담아 진심으로 칭찬하면서,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었다.


 칭찬 감사일기로 인한 변화는 나의 삶의 근간을 바꾸어 놓았다. 이후로도 삶에서 용기를 잃고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칭찬 감사일기를 쓰며 다시 용기를 내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행위나 결과로 나를 평가하는 마음에 휩쓸릴 때도, 다시 나의 존재에 대한 감사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또 나에게 해주는 모든 응원과 감사를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하면서, 불편하고 두렵기만 했던 인간관계는 점점 편안하고 풍성해져 갔다.

 



 치유의 과정에서 예외없이 직면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자신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싫지만 그래도 수용하려 애쓰는 사람은 함께 노력해볼 수 있지만, 계속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하기로 선택한 사람은 어떤 치유작업도 불가능하다.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단언컨데 다음 스텝은 없다. 자기수용이 모든 치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로부터 관계와 일과 삶이 펼쳐진다. 나의 존재를 거부하는 순간 나머지 것들은 보살필 것도 없이 모두 거부된다.


 나는 지금도 칭찬감사일기를 과제로 종종 내준다. 그럴 때마다 과거의 나와 똑같이 격렬히 저항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너무 간지럽고 오글거린다고...나를 칭찬해 본 적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너무 어색하다고... 칭찬해주기엔 한심한 게 너무 많다고.....

 오랫동안 자신을 미워했던 사람이 얼마나 자신을 수용하고 사랑하기 어려운지 잘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럴 때마다 과거의 나에게 했던 질문을 던져준다.


'그러면 계속 이대로 살고 싶어요?'


 기수용은 선택과 훈련의 영역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노력없이 저절로 되지 않는다. 자신을 거부할지 수용할지는 어린 시절 불행한 환경이나 아픈 상처나 자신의 기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나를 사랑하기로 선택하고, 익숙해질 때까지 훈련하는 방법밖에 없다.


  모든 변화는 선택에서 시작된다. 어떤 좋은 치유프로그램도, 어떤 훌륭한 상담사도, 변화하기로 선택하지 않는 사람을 도울 방법은 없다. 하지만 선택은 생각보다 두렵고 불편하다.

저항감을 넘어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이 질문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계속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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