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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조성 강사 라라 Jun 02. 2023

열정의 변천사


어떻게 저렇게 열정이 넘치지? 나는 다 귀찮은데....


최근 몇 년 간. 나의 열정이 전반적으로 식어가는 느낌이 들어 위태로움을 느꼈다.

열정적인 사람들을 보며 '예전엔 나도 저랬는데... 지금은 저 정도는 아닌데...' 하는 생각도 들고.

'정말로 나이가 들어 내 열정도 사그라드는 걸까??' 위기의식을 느끼며 내 삶을 돌아보면,

또 그렇다고 내가 열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 뭔지 모를 알쏭달쏭한 느낌으로 '열정'을 요리조리 관찰하다 보니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십 대의 설렘 폭발 풋사랑평생 함께한 노부부의 발효된 사랑이 다르듯.

열정도 다 같은 열정이 아니라는 걸.





20대의 열정은 '야생마'였다.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른 채 마구 달렸다.

그냥 달리는 것도 아니고 늘 최고 속도로 달렸다.

눈가리개가 없어 방향도 없이 이리 저리 온 사방으로 달렸다.


그렇게 달리면 다칠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다는 것도 모르고 달렸다.

누군가 그렇게 달리지 말라고 달리는 방법을 얘기해 줬겠지만, 들어도 안 들렸다.


급했다.

내가 얼마나 달릴 수 있는지 내 체력도 모르고.

어디로 달려야 하는지 목적지도 모르고.

하루에 얼만큼 달릴 수 있는지, 언제 쉬어야 하는지, 상황 파악도 못하고.

그저 급했다.


이렇게 빨리 달리지 않으면 꿈에서 멀어질 것 같아서.

잠시 숨을 돌리고 쉬거나, 속도를 늦추거나, 나 자신을 돌볼 여유 따윈 없었다.


동시에 환상에 젖어 있었다.

달리면 되겠지.

게다가 나정도면 잘 달리잖아?

게다가 이렇게 열심히 달리고 있으니 뭐든 될 거야.


20대 나의 열정은. 무모함 불분명함이었다.





30대의 열정은 '겁쟁이'였다.



20대 내내 마구잡이로 내달린 결과.

체력은 소진했고, 제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열심히 해도 성취하지 못했던 경험들은 '해도 안된다'라는 비관주의를 끌고 왔다.


그렇게 30대에는 '비관적인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가진 능력은 별 볼 일 없고.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실패자이며.

나이는 점점 드는데 별 대책은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20대보다 더 절박해진, '나잇값 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20대처럼 마냥 핑크빛 미래를 꿈꿀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열정이 꿈틀대도 발걸음이 떼지질 않았다.


더 이상은 무모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은 실패하고 거절당하며 다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은 시간 낭비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은 비현실적인 꿈만 좇을 순 없었다.


실패를 두려워하니 모든 선택이 어려워졌다.

'내 나이에 아직도 이런 상태'라는 자괴감에 주변 시선을 의식하니, 더더욱 두렵고 움츠러들었다.

그렇다고 또 열정을 포기하지도 못했다.


힘은 빠졌고. 두려움은 커졌고.

열정을 따라가려 애써봐도 모든 게 버겁고 무섭고 힘들었다.


30대 나의 열정은 소심함과 겁먹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눈물의 씨앗'같은 것이었다.





40대, 지금 나의 열정은 '시몬스 -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다.


20대 때 야생마처럼 미친 듯이 질주한 덕에, 온갖 무모한 경험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 수 있었다.

30대 때 잔뜩 소심해지고 겁먹은 덕에, '꿈과 현실을 조화롭게 다루는 힘'과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


40대가 되어 가장 좋은 건. 더 이상 조급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추장 된장이 익어가듯, 뭔가 되어가려면 최소한 40년은 넘어야 했던 것인데.

미친 듯이 조급했던 2, 30대에는 그 사실을 도무지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느긋하게 열정적'이라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던) 단어가 일상으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열정적이지만, 그 무엇도 급하지 않다!!!


주요 원인 중 하나는 2, 30대보다 현저히 떨어진 체력에 있다. -_-;;

2,30대에 조급함에 몸을 돌보지 못했던 흔적들이 40대가 되어 모두 아우성치며 등장한 느낌이다.

서두르고 싶어도 알아서 몸이 브레이크를 걸어주니 서두를 수가 없다.

더불어 '건강'보다 중요한 게 없다는 걸 직간접적으로 강렬히 경험했기에,

'몸에 무리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엄청 강해졌다.


느긋해질 수 있던 또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알고 한다'는 것이다.

내 꿈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꿈을 이룰 수 있는 나의 재능은 무엇인지, 현재 얼만큼 숙달되었고 어떤 훈련이 더 필요한지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서 효율적으로 일하는 법도 알고 있다.

경험이 풍부해져서 전략과 전술 또한 풍부하고 유연하게 짤 수 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지 않고 일상을 균형 있게 사는 법도 알고 있다.



알고 하는 것의 단점도 있다.

귀찮다.

꿈을 이루려면 내가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그 과정에 얼마나 무수히 많은 단계가 있는지 안다.

그 단계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날로 먹을 수 없기에, 모든 단계마다 온전한 성실함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겪을 실패의 쓰라림도 성취의 만족감도 다 '아는 맛'이다.

꿈에 대한 환상도 없고, 현실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도 없는 대신.

그냥. 그 모든 걸. 손수. 일일이. 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쫌 귀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귀찮음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사는 하루하루가 나를 행복하게 온전하게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



이렇게 40대에 느끼는 나의 열정은. 호들갑스럽지도. 활활 타오르지도 않는다.

20, 30대와는 다르게 아주 자주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고요하고 편안하다.

(그래서 내 열정이 식은 줄 알았...;;)


40대 나의 열정은. 내 인생과 나에 대한 믿음. 사랑. 그것들을 바탕으로 한 '조급함 없는 인내'다.




열정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다. 



50대의 나의 열정은 여전히 시몬스 같을까?

아님 50대에는 또다시 뜨겁고 격정적으로 타오르는 불꽃이 될까??

아직은 안 살아봐서 모르겠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열정이란 게 늘 한 가지 모습은 아니라는 거다.


때로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야생마이고.

때로는 숨겨진 슬픔과 두려움이며.

때로는 고요한 안정감일 수도 있다는 것.



어디엔가 있을 과거의 나와 같은.

무모한 야생마 같은 20대에게 응원을 보낸다.

무모한 열정이야말로 삶으로 깊이 뛰어들어 정말로 삶을 경험하게 이끄니까.


두려움을 끌어안고 잠 못 이루는 30대에게 사랑을 보낸다.

두려움에 사로잡혀본 사람만이 두려움을 통과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이젠 열정조차 식어버린 걸까?' 의심하는 40대에게 격려를 보낸다.

그저 열정의 '형태'가 변한 것뿐이라고.

몇 날 며칠 밤새도 피곤한 줄 모르고,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드는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 아니어도.

고요하고 푸른. 안정적인 불꽃이어도 괜찮다고.



당신의 열정이 지금 어떤 형태든. 

당신의 열정은 지금 이순간에도 당신을 성실히 안내하고 있을 것이다. 

가장 당신다운 삶으로. 

사랑과 확장의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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