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영유아 공연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기들이 관객인 공연은 처음이라,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객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3세 이전 아이의 발달과정과 놀이’에 대해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 그 내용이 너무도 흥미로웠다. 그 중 한 가지를 소개해보면, ‘한 살이 된 아기는 몸에 똑같이 생긴 손이 두 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두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는 것을 발견하고, 손을 마주치며 자신이 만들어낸 소리에 즐거워하는 ’박수치기 놀이’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도 아기였을 때 내 몸에 손이 두 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신기했겠지? 우리 모두 다 그런 아기들이었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아기 관객들을 만날 날이 더욱 기대됐다.
드디어 공연 날, 아기들의 호기심 넘치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아기 관객들은 입장하자마자 온 공연장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무대 커튼 뒤에 들어가고, 객석을 기어 올라가고, 세팅된 악기들을 하나씩 만져봤다. 연주하고 있는 내 옆에서 같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도 했다. 가끔 배우들의 움직임을 넋을 잃고 보기도 했지만, 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버렸다. 아무 제한도 긴장도 없이 호기심이 가는 대로 탐색하고, 무엇이든 시도하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아기들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아기들과 함께 온 부모님들의 행동이었다. 아기들이 자유롭게 움직여도 되는 공연임을 미리 알렸는데도, 부모님들은 아기를 공연에 집중하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거기 말고 여기 봐야지’ 하며 다른 곳에 가지 못하게 붙잡고 배우들을 보게 하려 했다. ‘저게 무슨 색깔일까? 어제 알려줬지?’ 하며 공연을 통해 무언가 ‘교육’하려 하기도 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아이들은 이내 짜증을 내고 울어버렸고, 부모님은 그런 아이를 안고 공연장 밖으로 나가기 바빴다.
내가 목격한 장면이 바로 아기었을 때 완전히 자유로웠던 창조성이 막히게 된 시작 지점이었다. 어른들이 아기의 자유로운 창조성을 ‘틀 안’으로 넣으려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있는 곳은 언제나 산만하다. 생명력이 넘쳐서 그렇다. 걸어도 되는데도 전속력으로 뛰어다니거나 춤을 추며 다닌다. 온갖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잠시도 조용히 있지 않는다.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모든 것에 대해 ‘왜?’라고 묻는다. 부모님이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들을 계속 퍼부으며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보이는 모든 것을 직접 만져보며 경험하고 싶어 한다.
아이의 넘치는 에너지, 즉 ‘자유로운 창조성’은 교육과 함께 막히기 시작한다. 산만했던 아이들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조용하고 얌전해진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수업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며, 즐거움이 아닌 의무감으로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다. 교육 과정을 마칠 때쯤엔 창조성을 거의 잃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 살아간다. 그런 어른이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창조성을 막는 과정이 반복된다.
교육학자 켄 로빈슨은 ‘학교가 창조성을 죽인다’라고 했고, 다중지능 창시자 하워드 가드너도 ‘교육받지 않은 마음이 창조성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창의력 발달 교육은 넌센스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창조적이다.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창조성을 막지 않으려면 어른들의 창조성을 되찾는 것이 먼저다.
교육의 목적은 직업 훈련이 아니다. 교육의 목적은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 인간답게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동서양의 교육의 모든 어원은 ‘내면에 지닌 것을 밖으로 끌어낸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받은 교육은 우리의 잠재된 능력을 꺼내 잘 살 수 있게 돕지 못했다.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교육의 목표였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창조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창조성을 되찾기 위해 해야할 중요한 일은 ‘탈학습’이다. 창조성을 위해 무언가 더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 과정에서 창조성을 잃게한 생각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익숙하게 굳어진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부디 우리 후손들은 우리처럼 배운 것을 다시 버려야 하는 탈학습 과정 없이 교육을 통해 창조적으로 성장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먼저 창조성을 되찾는 것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