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혜, 구멍의 존재론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구멍 난 것들에 대해 연약하다 여기고 외면하는 버릇이 있다. 나의 약함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조차도 모르고 싶어서 아닌 척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어쩔 수 없이 그 구멍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날에는 종종 그만둘까 싶어지는 마음이 울컥 차오른다.
그래요, 아무 데나 괄호를 쳐서는 안 되죠. 적당히 쳐야 해요. 괄호 쳐야 하는 것은, 가령 세계의 의미나 인생의 허무에 대한 과도한 망상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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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들은 머릿속의 구멍을 점점 크게 만듭니다. 딱지가 질 시간도 안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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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너무 고파서, 뭐든 입에 넣고 보는 선택이 우리를 슬퍼지게 만드는 거겠지요
- 유선혜, '괄호가 사랑하는 구멍' 중에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뭐든 입에 넣고 소화시키려고 했다. 그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성숙해지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인은 말한다. 괄호를 적당히 쳐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에 괄호를 쳐버렸다.
"밤하늘이 흰색 콘크리트 벽에 큰 빔 프로젝트로 쏜 그림자라거나" 같은 허무맹랑한 상상은 할 줄도 모르는 현실주의자인 나는 모든 낭만과 비현실에, 꼭 풀어야 하는 숙제같은 것들에도 괄호를 쳐 댄다.
괄호 안에 넣어두면 잠시 견딜 만해지다가도 머릿속의 구멍은 점점 커진다. 딱지가 질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순간들은 티를 낸다. "경련을 잠시 일으키다 이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 말이다. 아무리 괄호를 쳐도, 점점 영역을 넓혀가며 제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구멍들이 있다.
시인은 구멍을 이렇게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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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든 것의
타고난 결핍
타고난 허무
타고난 무의미
타고난 균열
타고난 어긋남
이것들에 붙일 알맞은 이름을 생각했어요.
구멍
오래도록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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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영혼에도 구멍이 있다고 믿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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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켜버린 순간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것
구멍을 마주치면 도망가는 것이 인간의 순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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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선혜, '구멍의 존재론' 중에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구멍을 마주하게 되면 나는 어김없이 도망쳤다. 자꾸만 그 곳에 시멘트를 들이 붓고, 다시 평평하게 만들고 새롭게 쌓아올리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런 '리셋'하는 버릇이 잘못되었다고도 내게 말했다. 그렇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밟고 지나가거나, 그 구멍이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부어놓은 시멘트가 충분히 굳을 시간이 없어서 가끔은 발이 푹 빠질지언정. 그게 구멍을 대하는 주된 내 자세이다. 그래서 "구멍을 마주치면 도망가는 것이 인간의 순리입니다"라는 이 문장이 이상하리만치 위로가 되었다. 외면하고 도망가고 싶은 건 그저 인간의 본성이라고.
우리에게 빈 곳을 채워 넣으라고 명령하는 구멍의 중력. 비어있는 것의 질량. 갈구하는 묵직함.
누군가는 구멍 속에 타인을 구겨 넣기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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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구멍을 가진 영혼을 주무르면 물론 도넛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영혼이 무르익을 때, 밀가루가 부풀어 오를 때 나는 찰나의 달콤한 냄새 같은 것.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는 아주 잠깐의 풍경.
사실은 얼룩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의미 같은 것.
우리의 영혼으로 만든 도넛을 베어 물면, 늘 모르는 맛이 납니다.
- 유선혜, '구멍의 존재론' 중에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내 낭만은 어느 한 시절에 갇혀서 가끔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지금의 나에게는 구멍, 빈 공간으로 남겨두고 있다. 섣불리 채울 수는 없는 내 소중한 구멍.
그리고 또 어디에 뚫려 있는지도 왜 있는지도 모를 구멍이 여러 크기로 존재한다.
구멍의 존재를 외면하고 싶은 이와 어떻게든 존재의 이유를 밝혀내겠다는 이의 충돌.
채울 수 있는 것으로의 최선, 채우지 않음으로써의 가벼움과 공허함.
아무거나 주워 먹었다가 더 탈 나진 말아야지. 파헤치려 들다가 굴 전체가 무너질 것 같을 땐 간신히 버티는 그 힘만으로 고개만 돌리기. 거기에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과, 아직 이해하지 못한 나 자신의 일부가 숨어 있고.
회피가 정답은 아니어서, 영원히 눈 감을 수는 없어서.
구멍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무력해지지 않는다.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아서, 그 도넛이 오늘은 무슨 맛인지 곱씹어 본다.
그리고 정말 가끔은, 그 구멍에서 나의 목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을 듣는다.
하지만 나의 도넛은 '늘 모르는 맛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