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리, '월요일의 도시락'『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
영감이 없다며, 무기력한 날들을 보내는 중이었다. 뭔가 쓰고 싶고, 써내야 할 것만 같은데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영 떠오르지 않았다.
차분한 연보랏빛 표지에 오밀조밀 스티커를 붙여두고도 펼쳐보지 않았던 시집을, 마침내 일요일 오후에 집어 들었다. 그 안에서 계단을 굴러 내려가는 방울토마토를 만났다.
내 일상은 매주 거의 똑같았다.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뜨고, 일어나 머리를 감고 말리고, 같은 길을 걸어 같은 일을 반복한다. 최대한 밍기적거려도 결국 비슷하게 흘러간다.
그 단조로운 시간 속에서, 시 속에서 굴러 내려오는 아득한 방울토마토가 내 눈앞으로 와 굴러 멈춘 듯했다.
통제 밖에 놓여있는 많은 것들이 생각난다.
오래 바랐지만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 내 뜻대로 일어나지 않는 인생의 사건들.
이건 분명 내 몫임이 분명한데도 자꾸만 미뤄지는 일들. 줄어들다가 다시 늘어나는 카드 할부처럼, 몸무게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
정말이지 진부하다. 진부함 투성이라 나열하다가도 지루해질 정도다.
그런데 시인은 불쑥 말을 건넸다.
"당신들이 대체로 뻔하고 진부해질 때/ 방울토마토가 하염없이 굴러가는 일을 한번 생각할래?"
멈춰있던 시선 앞으로 방울토마토 몇 알을 굴려 보내버린다.
방울토마토가 쏟아졌다
아침이 계단으로 사정없이 굴러가는데
달아나는 토마토를
멈추어야 하는데
더욱더 멀리 아득하게
내려가고만 있네
고 작고 말랑한 것이 손쓸 수 없도록
더 내려갈 수 없을 때
올라갈 수 없는 위가 생겼는데
당신들이 대체로 뻔하고 진부해질 때
방울토마토가 하염없이 굴러가는 일을 한번 생각할래?
계단은 끝없이 쏟아지고
저렇게 경쾌한 노래는 남의 것 같지 않은가
토마토가 계단을 만들던 일
절망이 명랑하게 굴러가는 일
내 생의 문장이 이토록 힘을 받아 굴러간 적 있을까
왜 나는 여기 있지?
주워도 끝나지 않는 일이 왜 나의 일이지?
고민하는 동안
방울토마토는 두려움을 모르고 구르고 있네
털썩 계단에 주저앉을때
방울과 방울들이 목금소리를 들려주네
방울토마토 따라
굴러가는 월요일 말랑말랑해지는 월요일
토마토는 힘이 없는데 힘이 있지
속도가 근심을 다 지워버려서
도시락이 사라지면 어때 월요일을 모르면 또 어때
깨어난다면 그것이 꿈인 날들 속에서
여전히 계단은 굴러가고 있는데
- 이규리, '월요일의 도시락'(『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
(『사랑과 멸(『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토마토는 힘이 없는데도 계속 굴러간다. 굴러가는 걸 선택한 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중인데,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명랑하다.
나는 종종 ‘의미 있는 일,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쓸모 있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고 그냥 비워둘 수는 없다고 자책한다.
그러다 시의 화자처럼, "저렇게 경쾌한 노래는" 남의 것 같아 가만히 서 있는 내 모습이 겹쳐진다.
그러나 그 말랑한 방울토마토는 묵묵히 알려준다. 그냥 흘러가는 것도 하나의 방식일 수 있음을.
나는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지만, 사실은 그건 내 힘으로 물살을 헤쳐 방향을 틀어낼 자신 없는 마음이, 낙관하는 마음만큼이나 포함되어 있다.
진짜 낙관이라기보다, 힘이 없는 탓이라 여기며 받아들이는 체념 같은 마음.
그런데 힘이 없으니 멈출 수 없고, 멈출 수 없으니 오히려 앞으로만 나아가기도 한다.
멈출 수 없어서 굴러가고, 굴러가기에 멈출 수 없는 것.
힘이 없는데 힘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만 깜빡이는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수없이 얽히고 풀리는 실타래가 웽웽 소리를 내며 나름의 질서를 만들고 있다.
영감이 없어서 무기력이라 여겼던 시간이 사실은 다른 종류의 충만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토마토는 힘이 없는데 힘이 있지.”
그 말처럼, 내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긴 순간도 삶을 앞으로 굴려 보내는 힘이 되고 있다. 절망이 명랑하게 굴러가는 것처럼.
여전히 계단은 굴러가고 있고, 삶도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같은 계단을 구른다 해도, 토마토는 매번 다른 궤적을 남긴다. 월요일 역시 그렇다. 늘 같은 얼굴인가 싶지만 그 얼굴에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시간의 주름과 빛깔이 누적되어 어느새 8월의 마지막 주의 얼굴로 성큼 내 앞에 서 있다. 반복의 권태 속에서도 매번 다른 궤적이 남는다. 영감이라는 것도 어쩌면 토마토처럼 그냥 굴러가는 것일지 모른다. 애써 붙잡으려 할 때는 오지 않지만,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불쑥 내 앞에 와 멈추기도 한다.
토마토가 굴러간 자리에 자국이 남듯, 내가 보낸 시간들도 어딘가에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나는 나의 흔적들을 명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