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느긋하게 3주 살기

제주살기 18일: 비와 안개와 물방울의 이야기

by 달문

아침부터 비가 거세게 온다. 오늘은 짐을 싸서 제주시로 이동해야 한다. 낑낑대며 차에 짐을 싣고 출발하려고 보니 폭우 수준이어서 섬을 가로질러 제주시로 가기 두렵다.

근처 카페인 오브제주에 와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문득 폰을 보니 방금 체크아웃한 더나은스테이 펜션 사장님이 문자를 보내셨다. ‘방 깨끗하게 사용해줘 감사해요 젊은이들은 아무렇게나 쓰는데 ㅇㅇ호 손님은 뭐가 달라도 다른 사람 같네요’라며 다음에 제주 올 때 들리라는 내용이었다. 시작부터 비바람으로 막막했는데 갑자기 힘이 나는 듯했다. 이렇게 따뜻한 문자라니. 앞으로 머문 자리 정갈히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더나은스테이펜션에서만 쭉 머물게요.. 기운 내 아점 먹으러 출발해본다.

금악무짠지냉면에 와 물냉면과 고기완자를 먹었다. 뜨끈한 고기완자 찢어 먹고 물냉면 국물 한 숟가락 떠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근데 오늘 날씨가 장난이 아니다. 서귀포에서 제주 넘어오는 내내 비바람과 안개가 심했는데 산을 넘어오면서 안개가 더 짙어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차들이 비상등 켠 채로 주행했다.

식사하고 나왔을 때 안개 상황이다. 근처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에 들르자.

미술관에 오고 보니 비 오는 날이 또 선물처럼 느껴진다. 안과 밖이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김창열은 물의 고장에서 태어났단다. 그래선지 물방울을 다룬 작품이 많다.

신문지나 드로잉 작품 위에 물방울을 그려낸 작품부터, 분수와 물방울이 어우러진 설치 작품 ‘삼신’까지. 삼신의 분수는 10분마다 나온다. 이미 내려 고여 있는 빗물과 원래 작품을 구성하던 물, 지금 떨어지는 빗방울과 10분마다 새롭게 뿜어내는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들이 모두 <삼신>의 구성요소가 된다. 나를 폭우와 안개라는 극한의 운전 상황으로 몰아붙인건 김창열미술관 공간의 특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인가? 여행하다 보면 절로 드는 자뻑 같은 운명론이다.

실감영상관에 들어가 ‘무중력 물방울’을 감상한다. 비와 물방울 작품들로 몸과 마음이 모두 촉촉해진 상태로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을 나왔다. 근처에 제주현대미술관도 한 번 들렀다 가야지.

이미성 ‘기억의 풍경’ 앞에 발길이 멈춘다. 미술관에서 또 다른 미술관인 여기까지 걸어온 길이 이러했다. 희끄무레한 안개 속을 걷는 일은 실제였고 지금은 액자 속에 그 풍경이 그려져 있다. 내가 지금 꿈결 속을 걷는 중인지 실제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혼란이 온다.

빗자루 같지만 바람에 떨어져 시든 야자수 잎이다.

안개에 정신마저 흐릿해지는 듯하여 카페에 들어와 잠시 쉬다 제주시 숙소로 갔다.

제주시 숙소는 센터포인트N이라는 레지던스인데 굉장한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했다. 서귀포시에서는 저녁 7시면 온 동네가 어두컴컴해져서 숙소 밖을 돌아다니지 못했는데 여기는 별천지였다. 괜히 마음이 들떠 밤거리를 헤매다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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