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느긋하게 3주 살기

제주살기1~2일(아침): 정령의 숲과 모닝 미라클

by 달문

4월 제주에서 3주 지내고 돌아왔다. 매일 사진을 찍고 메모장에 기록했지만 블로그에 남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달이 넘게 지난 지금 벌써 그 시간들이 내가 직접 누린 게 맞는지 의문이 들 만큼 흐릿해진다. 오래 기억하기 위해 차근차근 기록을 남기려 한다.

제주에서 이동은 자차로 했다. 제주 도착하기 전날 탁송 업체 기사님이 우리집 앞으로 차를 받으러 왔고, 제주에 도착해 공항에서 다른 기사님이 게이트 바로 앞까지 차를 가져오셨다. 짐을 공항에 들고갈 필요 없이 미리 차로 보낸다는 점,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낯선 렌터카가 아닌 익숙한 내 차로 출발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제주공항에서 차를 받아 근처 신산공원으로 향했다. 수도권에는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제주는 이미 만개했다고 들어 마음이 급했다.

여기는 아예 겨울이 오지 않았다?

신산공원에서 처음 든 생각이다. 떠나올 무렵 서울은 꽃은 피었어도 초록 잎이 이제 몇 개 보였는데 여긴 울창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후박나무 같은 상록 가로수들이 많아서 겨울에도 푸르단다. 굵은 나무에 달려있는 윤기 나는 초록 이파리들이 반가웠다.

만개해 떨어진 벚꽃잎을 밟았다.

친구에게 영상을 보내자 요정이 사는 숲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트롤이나 정령, 호빗이거나 요정이거나 하여튼 인간 아닌 무언가 살 법한 이세계 숲 같다. 색 조합이며 분위기, 새소리까지 상서롭잖아.








초록 이끼와 검은 현무암과 빨간 동백이 한 시야에 들어온다. 부러 꾸몄어도 이렇게 생생히 아름답긴 힘들테다.

벚꽃과 튤립 매화과 돌과 이끼 풀이 한 시야에..(이하 생략)

제주의 봄이 눈부셔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현기증을 달래기 위해 고기국수 먹으러 왔다. 신산공원 길 건너 국수마당이다. 제주의 첫 끼는 역시 고기국수지.

오후 비행기로 도착해 벚꽃 보고 저녁 먹고 나니 어둑해졌다. 첫 번째 숙소인 제주시 구좌읍에 위치한 두베하우스로 향했다. 작년 말 아끈두베에 묵으며 만족스러웠는데 같은 사장님들이 아끈두베 전부터 오래 운영한 곳이 두베하우스라고 해 믿고 5박을 묵기로 했다.

체크인 후 가계부 쓰고 잠들었다.



휴직 후 낮밤이 바뀌었는데 바로잡을 이유가 없어 그냥 아침 없이 지내왔다. 제주 와서 확실히 바뀐 점은 나에게 아침 시간이 존재했다는 거다. 미라클 모닝이라기엔 민망하니 모닝 미라클 정도로 하자. 기상 시간은 공교롭게 조식 시간-10분 전으로 고정되었다. 조식이 8시반에 나오면 8시 20분에, 9시에 나오면 8시 50분에 일어나는 기적의 아침 시스템!

첫 조식이 성게미역국이라니 럭키비키~ 원영적 사고 아니고 실제로 운 좋은 사람이다. 조식 먹고 배불러 동네 산책 한 바퀴 돌았다. 제주에서 계획이 있던 날은 몇 일 되지 않았다. 당일에 아침 먹으면서, 산책하면서 어디 갈지 정하곤 했다. 주민까진 아니어도 느슨한 여행자의 기분으로 지내고 싶었다.







어딜 가도 지천인 유채꽃(대부분은 사실 배추꽃이라 한다)을 처음 마주친 아침이었다





인상적이었던 세화 바다 간판을 다시 만나고 숙소로 돌아왔다.

공용 공간이자 조식식당, 서점이기도 한 삼춘책방에 앉아 커피와 사장님이 주신 빵을 먹으며 잠시 정여울 에세이를 뒤적였다. 미역국 먹고 바다 산책 후 책 읽었는데 오전 11시가 채 되지 않았다니, 이게 바로 모닝 미라클이다.

지친 당신의 어깨 위에, 우리가 정성 들여 빚고 깎고 다듬은 소중한 이야기가 지닌 따스한 환대의 에너지가 부디 가닿기를 바랍니다.
정여울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줄게>

그날 읽은 책 구절처럼, 따스한 환대의 에너지가 안에서부터 차오르는 아침이었다. 그리고 아직 하루는 한창이었다. 오늘 뭐 하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