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기 2일: 올레길을 걷는 이유
오늘 뭐 하지?
내일부터는 엄마가 오기로 되어 있어 오늘이 제주 와서 혼자 온전히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첫날이었다.
올레길 코스 하나를 완주해보고 싶었다. 날이 흐리고 비가 오지 않아 오래 걷기 덜 부담이었다.
걸어보자!
숙소 근처인 제주해녀박물관에서 출발해 하도해수욕장, 지미봉을 거쳐 종달바당까지 걷는 21코스를 정방향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총 11.3 킬로미터고 세네 시간 걸리는 난이도 하 코스다. 11킬로미터를 걷는데 난이도가 낮다고요..?
올레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 게 처음이라 겁 났다.
‘여자 혼자 올레길’이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사건들이 내 얘기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아름다운 제주의 길을 걸으면서도 살해 당할 걱정하는 현실이 어이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여자 혼자 올레길 걸을 때 주의할 점
1. 한적한 코스로 다니지 말기
2. 걷기 시작할 때 제주올레 콜센터에 전화할 것
(제주올레 콜센터 064-762-2190)
올레콜센터에서는 한 시간마다 전화로 내 행적을 확인하고 두 번 이상 전화를 받지 않으면 경찰과 연계한다. 콜센터 전화를 받는 일이 다소 귀찮을 수 있지만, 내 경우에는 “지금 어디쯤 걷고 계세요?” 묻는 따뜻한 목소리의 전화 동행이 생겨 안심되고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고마운 배려다.
해녀박물관에 주차하고,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쪽 옆길로 걷기 시작한다.
올레길 걸을 때는 리본이나 화살표로 된 이정표를 따라다녀야 한다.
파란색 리본이 정방향, 주황색 리본이 역방향이다.
각종 걷기 모임이나 단체에서 달아놓은 다른 리본들을 따라가면 안되고 꼭 정해진 리본을 따라가야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길을 잃으면 마지막 리본을 본 장소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제주올레 콜센터에서 알려주신 소중한 정보다.
제주 올레 마스코트인 조랑말 모양 간세는 정보와 방향을 알려준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그마한 연대동산을 넘었다.
올레길을 걸으면 마을, 바다, 숲, 오름 등을 고루 지나가게 된다. 스팟만 찍고 떠날 때는 느낄 수 없던 세세한 아름다움에 녹아든다.
간세와 화살표 잘 따라가니 길 잃을 걱정이 없다.
노란 꽃이 유채인 줄로 알고 걸어다니다 문득 궁금해져 검색해보았다. 대부분 배추꽃이라고 하는데, 걷다가 커다란 무밭이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역시 배추도사 무도사가 괜히 명작이 아니야(?)
밭담과 수풀을 지난다. 나뭇가지에 달아놓은 리본들은가지가 꺾이거나 부러지면 어떻게 하지?
모든 리본을 관리하기 쉽지 않을 텐데.. 궁금하지만 그냥 감사히 지나간다.
제주 최고령 해녀로 활동한 고이화님 생가다. 남달리 몸집이 크고 숨이 길어서 어린 나이에도 ‘애기상군’으로 불리고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기개가 대단하시다.
고이화님 생가를 지나며, 이런 건 올레길을 걸어야만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의 시작부터 끝까지 오래 걸어야 느껴지는 정취가 있다. 제주의 모든 것-바다와 숲과 오름과 문화와 역사-에 흠뻑 적셔진다는 감각이다.
노란 배추꽃과 검은 밭담. 제주 사는 동안 가장 많이 본장면이다. 눈 감으면 이 풍경이 한동안 아른거렸다.
제주 밭담을 이으면 지구 반 바퀴를 돌고도 남는 길이라고 한다. 시꺼먼 현무암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어 흑룡만리라는 별칭이 붙었단다.
밭담길을 걷고 나니 하도 바다가 나타났다.
오래된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활용한 벤치에 잠시 앉아쉬며 생각했다.
뭐 좀 먹어야겠는데..?
토끼섬 맞은편에 있어 ‘토끼썸‘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지닌 듯한 카페에 갔다. 크로크무슈와 밀크티로 당 고속충전 완료. 출발 이후 한 시간 반 정도 걸었으니 이제 반 왔다.
하도해수욕장을 지나자 멀리 지미봉이 보였다. 어디서보았나 했더니 어린왕자에 나오는 코끼리 삼킨 보아뱀형상이다. 검색하니 이미 보아뱀 형상으로 유명하다.
어딜 가든 이제 지미봉은 구별할 수 있겠다.
근데 내가 저기를 올라야 한다고?
마침 제주올레 콜센터에서 어디쯤 걷는지 연락 왔다.
“지미봉이 보인다고요? 거기만 올라갔다 오시면 거의 다 간 거예요”
어휴, 힘내볼게요.
가까워지는 지미봉. 한적해 살짝 무서워지려고 할 때쯤 다른 여성 올레꾼들 여러 분이 뒤따라 왔다. 너무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도록 의식하면서 걸으니 의지가 됐다. 그분들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지미봉 둘레길의 벚꽃을 뒤로 하고 정상으로 향하는 오르막을 올라보자.
지미봉은 높지는 않지만 가파르다. 그래서 정상까지 빠르게 오를 수 있지만 계속 가파른 구간이라 거의 숨이 넘어갈 뻔했다. 스스로 멱살 끌고 오르는 느낌으로 오른쪽 줄을 부여잡고 갔다.
오름을 여러 곳 다녔지만 그 중 쉬운 오름은 아니었다.
정상에 오르니 우도(왼쪽)와 성산일출봉(오른쪽)이 보였다. 정상에는 올레꾼이 여러 분 계셨다. 시원한 바람 맞으며 서로 사진 찍어주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올레길 전 코스를 다 걸었다는 두 분이 내가 혼자 걷고 있다 말하니 매우 걱정하셨다.
지금 걷는 이 21코스는 그래도 으슥한 곳이 별로 없는데 다른 코스들은 아닌 곳들이 많으니, 꼭 누구와 함께 걸으라고 당부하셨다. 네, 다른 코스는 동행과 걸을게요.
지미봉에서 내려와 종착지인 종달해변을 향해 간다. 창고 건물에 붙은 화살표가 귀엽다.
내가 정말 여기까지 걸어서 왔다니요.
낡은 종착지 표지판이지만 그래도 찍어본다. 이제 해녀박물관으로 차 가지러 돌아가자. 버스정류장까지 1.2킬로 걸어야 한다. 택시를 탈까 했지만 이미 너덜너덜하게 걸었는데 1.2킬로는 껌이지.
물론 카페 한 번 더 들렀다 간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껌이다. 빨리 돌아가고 싶어 까눌레 하나만 포장했는데 음향 장비가 예사롭지 않아 오래 머물러도 좋을 카페 모뉴에트였다.
더러운 손 주의. 지미봉에서 기어올라가느라… 손 씻었는데 안 지워진 거임.(아무도 뭐라 안함)
걸어가며 술이 들어간 한라산 까눌레 해치웠다. 이 집 까눌레 잘하네. 아침부터 먹은 빵만 4개째였다.
빵심으로 걷는 한국인이, 있다?!
뽀짝, 담 위로 뛰는 고양이 찍어주고
종달초등학교 버스 정류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201번 버스는 초만원인데다가 굉장한 레이싱 버스였다. 해녀박물관에서 내리지 못할까봐 황급히 빠져나왔다. 무섭지만 덕분에 빠르게 도착했다.
숙소 들어가기 전에 제대로 된 저녁을 먹어야겠다. 흑돼지 두루치기 혼밥이 가능한 식당에서 싹싹 비벼 먹었다. 콩나물국에 무가 숭덩숭덩 제법 들어있어 시원했다.
둘째날 혼자 올레길 코스 한 개를 완주하고 나니 앞으로 제주에서 무엇이든 씩씩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붙었다. 제주를 이제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처럼 속속들이 느낀 적은 없었다는 겸손함도 따라왔다. 왜 올레길을 걸어야 하는지는, 올레길을 걸어봐야 알 수 있다.
(동어반복 같지만 걸어보니 이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이날의 만보기 기록으로 제주살기 둘째날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