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느긋하게 3주 살기

제주살기 4일: 웰니스와 엄마의 니즈

by 달문

제주살기 4일차이자, 엄마와 함께하는 첫 아침이다.

3주 동안 숙소를 네 군데 예약했다. 조식 주는 게스트하우스 5박씩 두 곳, 취사 가능한 펜션 7박, 레지던스 4박이었다. 취사 가능한 숙소에 묵을 때 엄마를 초대하면 내내 밥 해먹고 치우느라 둘 다 푹 쉬지 못할 것 같았다. 다소 좁아도 아침을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을 때 엄마를 오시라 한 이유다.

두베하우스 조식 3일차 - 한치덮밥

매콤한 한치덮밥으로 아침을 챙겨 먹고 바로 다랑쉬 웰니스 투어를 하러 나섰다. 세화 마을 협동조합의 질그랭이 센터에서 여러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내가 신청한 투어는 오름의 여왕 다랑쉬 오름 둘레길 3.4km를 해설사님과 걸으며 다도체험, 명상, 만들기 체험, 자연 해설을 듣는 프로그램이다.

관광과 의미 있는 체험을 같이 해보고 싶다면 질그랭이 센터를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

오늘 투어는 나와 엄마 단 두 명이 신청했다고 한다. 해설사님과 우리, 세 명이 호젓하게 걸어다닐 수 있다니 완전 럭키달문이쟈나! (중독성 있어.. 오늘까지만 해야지.) 2일 전 예약했고, 전날 질그랭이 센터에서 확인 전화가 왔다. 당일에는 해설사님의 등산화 신고 오라는 당부 전화까지. 세심하게 챙겨주셨다.

다랑쉬오름 탐방안내소에 도착하자 강윤복 해설사 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얼마 전 안내소를 스스로 찾아왔다는 새끼 고양이를 소개해주셔서 냉큼 사진 찍었다. 인사 나눌 때 해설사님이 어떻게 이런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신청했냐고 물으셔서 우리는 교양인이 된 기분으로 기분 좋게 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투어는 해설사님의 차를 내 차로 뒤따라 가 정차해 내려서 걷고, 같은 방식으로 다음 장소로 옮겨가는 식으로 두세번 정도 이동하며 진행되었다. 오름 주변이라 한적하고 해설사님이 천천히 가주셔서 앞차를 놓칠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독특하고 주도적인 투어 형식이라 재미있었다.

다랑쉬굴 근처에 차를 대고 안쪽으로 걸었다. 작은 다랑쉬오름이라는 뜻을 지닌 아끈다랑쉬오름 주변으로 흰색과 보라색이 섞인 꽃이 지천이었다. 해설사님이 평소 궁금했던 꽃, 나무가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셔서 여쭈어보니 무꽃이라고 한다. 이 날 이름을 알게 된 꽃과 나무들이 많은데 전부 기억하진 못하지만 무꽃은 확실히 각인되어 이후 제주 곳곳을 다닐 때마다 눈에 들어왔다. 김춘수 시 구절(‘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처럼 무꽃이 내게로 온 날이다.

제주의 4월은 아름답지만 어딜 가든 4.3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방문한 시기가 4월 초여서 특별히 다랑쉬굴을 방문하기로 했다. 가는 내내 대나무숲이 무성했는데 대나무숲이 있던 자리는 원래 마을이었다고 한다. 4.3 때 중산간 마을이 모두 불타거나 소멸되어 민가는 사라지고 대나무만 남아 있다. 자연을 즐기되 역사의 흔적들을 알고 걸어가자고 하셨다.

용눈이오름도 보였다.
해설사님이 찍어주신 모녀의 뒷모습이다.

곳곳에 무가 엄청나게 버려져 있었다. 농사가 너무 잘되면, 상품성 좋은 무들만 남기고 버리는 무들이 많단다. 엄마가 저게 다 얼마야 하며 아까워했다. 흉작이어도 풍작이어도 농부들은 힘들겠구나.

해설사님이 대나무 잎을 따 손톱으로 구멍을 몇 개 내고 사이로 잎을 집어넣으니, 돛단배가 뚝딱 만들어졌다. 물 웅덩이에 띄우자 정말 배처럼 둥둥 떠 움직인다. 어린 시절 장난감이 없어 대나무 배를 여러 척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는 그저 신기하게 보기만 했는데 나도 만드는 법 배워놓을 걸 그랬다.

다랑쉬굴 유적지에 도착했다. 1948. 12. 18. 하도리와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굴이 발각되어 집단 희생당한 곳이다. 48년 토벌대가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입구를 봉쇄해 희생되었고, 91년에야 유해가 발굴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이후 입구를 콘크리트로 봉쇄횄다. 너무 늦은 발굴이었고, 제대로 된 추모와 사과는 그보다 더 한참 후였다. 다랑쉬굴 앞에서 함께 잠시 묵념했다.

다랑쉬굴에서 차로 이동해 다랑쉬오름 옆 둘레길에 주차 후 산책했다. 걸으며 비자나무, 편백나무 구별법을 배웠다. 비자나무는 잎이 한자 아닐 비(非)처럼 생겨서 비자나무라고 불리며, 편백나무는 잎이 편안~하게 나 있지 않느냐고 하셨다. 아닐 비라는 한자를 닮은 잎 모양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제 비자나무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겠다.

틈틈이 고사리도 땄다. 해설사님이 고사리나물 반찬 한 가지는 해먹게 해줘야지, 라며 작은 봉지를 준비해 적극적으로 따서 우리에게 다 주셨다.

웰니스가 무언가요? 자연 재료로 장난감 만들고 숲을 걷고 과하지 않은 선에서 고사리 따고, 요런 게 웰니스죠.

대나무피리도 만들었다고요. 셀로판지로 붙인 리드에 입술을 대고 힘껏 불면 놀랄 만큼 큰소리가 난다. 월드컵 응원할 때 들었던 아프리카 악기 부부젤라 수준의 데시벨이다.

해설사님이 엄마와 마주 보고 월드컵 응원 박자로 불어보라고 하시더니 영상으로 남겨주셨다.

‘뿌뿌~뿌 뿌뿌!’ (엄마)

“뿌뿌~뿌 뿌뿌!‘(나)

(대폭소)

해설사님 어릴 적 하루 종일 피리 불고 다녀서 할아버지께 많이 혼났단다. 동네가 시끌시끌했겠다. 우리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숲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웰니스 투어의 마지막은 차 마시기와 명상이다.

위에서 두 번째 사진 오른쪽 채소는 구좌 당근이다. 평소에는 묻어두었다가 뽑아서 장식용으로 쓰고, 체험이 끝나면 다시 잘 묻어둔다고 한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따뜻한 메밀차 마셨다. 오전부터 흐려서 살짝 추웠는데 따뜻한 차 마시니 온기가 돌았다. 해먹에 누워 숲을 느끼며 명상으로 체험을 마무리했다. 누워 있는데 제주 휘파람새 소리가 내내 들렸다. 웰니스가 별건가요. 자연 속에 누워 있으면 웰니스죠. (2절 3절 하는 타입)

오전 열 시 시작한 투어가 열두시 반에 끝났다. 원래는 두 시간 이내인데, 소수 인원이라 더 여유롭고 느리게 진행해주셨다고 한다. 덕분에 소중한 경험했다.



성산일출봉 근처 지은이네밥상에서 점심 먹었다. 비빔밥과 보말미역국을 시켰는데 청국장, 고등어 김치찜이 따라와 메뉴가 4개가 되어버렸다. 비빔밥, 보말 미역국 만원이다. 동네 분들이 많이 오시는 곳 같았다.




성산일출봉 근처 카페 왔는데 날씨 무슨 일이야. 거무죽죽한 바다에 엄마 표정이 심드렁했다.






우선 프릳츠 성산점에서 커피와 빵 섭취하면서 다음 플랜 생각해보자. 내가 와보고 싶었던 프릳츠 성산점은 성산일출봉 뷰가 좋지만 토요일이어선지 발 디딜 틈 없었다.

엄마 : “왜 이런 시장통에서 차를 마시니?”

나 : “그럼 테이크아웃할게”

약간 언짢은 상태로 포장해 차 안에서 마셨다.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조용한 차 안에서 카페인(라떼)과 탄수화물(산딸기크림빵)이 섭취하자 둘 다 기분이 나아졌다.

이번 여행에서 엄마의 요구는 딱 하나, 유채꽃과 바다가 한 컷에 담기는 곳에 가는 거였다. 섭지코지를 한번 가보았다.

풍광이 멋지긴 한데 이 느낌은 아니란다. 흐린 날씨 탓도 컸다. 오늘 날이 갤 기미는 없어 보인다. 그럼 다음날 제대로 된 장소를 찾아야 할 텐데 고민이 되었다. 아침부터 열심히 돌아다녔으니, 우선 숙소 근처로 돌아가 조금 쉬자.

아직 엄마는 고등어회 먹어본 적 없다고 해서 오늘 저녁은 청파식당 고등어회로 정했다.

작년에 방문해 먹어봤을 때 맛있어서 검증된 곳이라 고민 없이 갔다. 고등어회와 매운탕, 회덮밥이 포함된 커플세트 시켜 배불리 먹었다.

엄마와 저녁 먹고 세화에서 해맞이해안로 따라 평대, 김녕쪽 바다를 걸었는데, 돌이켜보니 그 시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종일 관광객 모드로 하루를 보내고 맛있는 저녁을 먹은 뒤, 더 이상의 일정이 없는 느긋한 저녁. 바다 너머로 해가 슬슬 넘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걸었던 그 길 말이다.

한편 다랑쉬 웰니스 투어는 보람차고 섭지코지는 멋졌으나, 엄마의 꽃+바다 니즈를 충족시키지 못해 조바심 났다. 어느덧 제주살기 4일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쉬움이 해소될지 아닐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