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from EP 1집 'Random' (2017) - 이진아
트레몰로 주법으로 사정없이 극저음의 피아노 건반을 타건하는 것으로 곡은 느닷없이 시작한다. 비장할 정도로 휘몰아치는 속도감 속에서 어떻게 곡이 전개될지 호기심이 발동할 즈음, 아예 계단을 딛고 오르다 못해 커다란 새의 날갯짓처럼 힘차게 도약하는 화려한 선율이 청자를 압도한다. 얼기설기 얽히는 화사한 멜로디의 분주함이 흡사 스티브 바라캇의 전성기 음악을 듣는 듯싶기도 하고 같은 소속사인 페퍼톤스의 청량함을 떠오르게도 한다. 이어 한결 경쾌해진 모습으로 타건이 재연되더니 이진아의 맑고 예쁜 목소리가 나지막이 공명한다.
모든 걸 해낼 순 없는 거잖아
잘하지 못해도 널 버리지 않아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 때에도
우린 그대로야
그렇게 앨범의 포문을 힘차게 열어젖힌 <계단>은 4분 33초 동안의 화려한 행진을 마무리하며 다음 트랙이자 타이틀곡인 'RANDOM'으로 넘어간다.
재즈팝을 주무기로 삼는 이진아에게 랜덤이란 단어는 단순히 재즈의 불특정성을 일컫는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이 EP는 사실상 그 일반적인 재즈의 특성마저 '무작위'로 섞어 보여준다. 재즈의 기법을 따르고는 있지만 곡을 이끄는 선율과 보컬은 결코 재즈스럽지 않으며, 리드미컬한 악곡의 운용으로는 일견 상상하기 어려운 계단의 견고함을 허를 찌르는 스펙트럼의 도입으로 훌륭히 묘사해냈다는 점에서 역설의 묘미가 존재한다. 결국 케이팝 스타에서 보여 준 모습에 의해 지극히 이쁘장하고 얄팍한 실용음악 정도로만 비칠 수 있었던 그의 음악관은 이 EP를 통해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창작자가 본인의 음악을 통해 보컬의 당위성을 설득해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음악에 대한 확신과 치밀한 연구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진아는 본인의 곡 작업 프로젝트를 식당 메뉴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나는 <계단>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크레이프라고 명하고 싶다. 겹겹이 쌓아 올리되 씹으면 씹을수록 다양한 풍미가 느껴지는, 그런 최고급 크레이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