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일지#1
연말 친구와 간 치앙마이 여행에서, 나는 2024년 목표를 세웠다. 그것은 바로 사랑 주기. 사랑을 준다는 건 결혼하기, 연애하기랑은 살짝 다르다. 사랑을 줄 대상은 굳이 지정하지 않았고(그 대상은 아이돌, 남자, 하나님까지 모두 가능하다) 그저 몰입하고 애정을 쏟을 만한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제발 사랑할 무언가를 내려주세요! 기도하고 나서 웬걸, 소원은 바로 이루어졌다.
그는 바로 작년 여름 한남동에서 놀다가 길거리에서 내 인스타 아이디를 따간 C. 팔로우한 이후부터 종종 만나자고 하긴 했었지만. 그때는 내가 바쁘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살짝 썸도 타고있엇고. 그러다 우연히 12월엔 그가 oo 은행에 합격했다는 스토리를 봤었고, 1월에 마침 그에게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DM을 주고받으면서 드디어 첫 만남은 이루어졌다. 이렇게 즉흥적이고 근본도 없는(?) 만남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그와는 1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 퇴근 후 강남의 피자집에서 처음 만났다. 처음 인스타를 주고받을 땐 사실 만취상태였어서 연하라는 점 외에는 그에 대한 그 어떤 점도 기억해 내지 못했었는데 막상 보니 기억도 어렴풋이 나고, 결론적으로 내 첫인상은 아주 좋았다. 내 새해 소원이여서일까, 외로워서일까, 그가 매력적이어서일까. 그 누굴 만나도 설레거나 심장이 뛰지 않던 내가 첫 만남 이후 홀라당 사랑에 빠져버렸다. 알고 보니 4살이나 연하였던 그는,
취업 준비하느라 스트레스 많이 받지 않았어?
아니 별로. 나 원래 스트레스 잘 안 받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난 완전 개복치 스타일인데.
사실 난 언제나 잘될 거란 믿음이 있어서 별로 스트레스 안 받아. 취준할 때도 내가 취업하면 언제 이렇게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겠어 하면서 즐겼던 거 같아.
아 이 얼마나 건전한 사상인가. 여우 같은 30대 간잡이 남자들에게 질려있던 나는 이 대화에서 흥미를 느꼈고 이 외에도 나와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점, 운동 특히 수영을 즐겨한다는 점에선 나랑 비슷하지만 담배, 타투가 있고 주관이 세단 점에선 나랑 다르다고 느껴지면서 더욱 그가 좋아졌다.
하지만 웬걸. 연락이 없었다. 나의 경험상, 웬만한 날 좋다고 한 남자들은 당연히 헤어지고 나서 잘 들어갔어? 묻는 게 인지상정인걸? 3, 4일간 기다리던 나는 결국 못 참고 그에게 다시 연락했다.
주말에 모해??
금토엔 약속 있고 일욜은 축구. 왜?
(왜라니 ㅠㅠ) 힝 놀자 하려 했지
아 아쉽네 담주 금욜은?
그렇게 다음 주 금요일을 다시 얻어냈지만, 사랑에 빠진 나는 보름의 시간을 어떻게 버틴다는 말인가. 매일 나는 유튜브에 intp 남자, intp 심리, intp 연애, 남자 심리, intp 이상형 등을 검색하며 그와 연애에 대해 마치 처음 연애해 보는 사람처럼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intp 의 정석처럼 연락이 일절 없고 정말 인간 고양이였는데, 나는 꾹 참았다. 대신 그가 약속이 있다던 토요일 밤, 나는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이 사연을 말하며 풀었다. 그가 읽기를 바라며 스토리를 올렸는데, 오! 그가 떡밥을 물었다. 밤 10시쯤 어디냐고 묻길래 친구들이랑 놀고 있다고 했고. 그는 심야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친구들도 내 사연을 아니까 너 먼저 가라고, 보내준다고 적극 지지해 준 덕분에 나는 극적으로 그와 번개를 갖게 됐다.
나의 집 근처 영화관에서 보기로 하고 만났는데, 심야 영화로는 2시 위시를 보기로 해서 그 사이 시간이 뜨는 것이다. 연 곳은 술집밖에 없었고, 나는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태이지만 그와 함께 더 있고 싶어서 졸린 상태를 참으며 가게에 들어섰다. 그러다 문득 좋아하는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너 인생 영화 뭐야?
이터널 선샤인.
아 그거 사랑 영화 아냐?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취했나 보다)
음.... 번식
번식?
번 식???
아무리 취한 나였지만, 저 대답에 너무 놀라버렸다. 그간 내가 생각한 그는 물론 당돌하지만 멘탈이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번식이라니.. 그때부터 내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찼고, 그렇게 굳어버린 뇌로 나는 영화관에 갔다. 처음으로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내 옆에 앉은 그. 그것 자체만으로도 긴장되는데 극장 내 불이 꺼지자, 그는 내 손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내 어깨에 기대고... 도저히 영화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재미가 없기도 했지만 그의 스킨쉽은 무언갈 의미하는 듯했다. 나도 그가 끌리고, 더 적극적으로 응해줄 수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잘해 보고 싶어서, 참았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입맞추게 될까 봐 오히려 화면 쪽으로 앞만 봤다.
어찌저찌 영화가 끝나고, 그는 피곤하다~ 국수 먹고 싶다~며 또 번식을 암시하는 말들을 내뱉었지만 나는 꿋꿋이 못 알아듣는 척하고 그를 집에 보냈다. 그때부터 나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는 섹스파트너를 구하는 것이었을까? 나는 어장 안의 물고기일까? 확실한 거 하나는 알게 됐다. 그는 나에게 호감은 있지만, 적어도 반하지 않았다는 사실. 오히려 이 시점에서 반해버린 건 나라는 걸.
올해 목표였던 사랑 주기...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아도 나는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면 고작 2주간 연락이 없는 것을 인내할 수도 있어야 하며, 그의 인성이나 나에 대한 마음이 어떤가 와는 상관없이 나는 있는 그대로 그를 바라봐주고, '추앙'해 줄 수 있어야 하기에. 이건 내가 여태껏 해본 적 없는 사랑의 형태였다. 이제부터 해보고 싶다고 순진하게 포부를 질렀지만, 막상 당해보니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흔든 사람도 얼마 없었기에 이 기회를 소중히 하자고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연락 없는 그와 다시 그다음 만남도 잡아보려 했지만 그는 애매한 말을 남기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는 회사 동료가 퇴사하면서 그 후임이 바로 구해지지 않아 그녀의 일을 모두 도맡아 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진급 발표가 곧 난다고 소문이 돌면서 나는 진급 누락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정신이 사랑보다는 회사 쪽에 쏠리면서 나도 좀 미련을 놓게 되었다.
그렇게 그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지도 언 1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요즘 어떤 영화가 재밌다더라 하면 그가 떠오른다. 아 걔랑 그 영화 보러 가고 싶다. 걔는 결국 신입 연수 끝에 어느 지점을 배치받았을까? 나의 알량같은 자존심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
그는 내가 노력할 만큼 좋은 인성을 가진 사람은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알아 아는데도 그가 끌리는 걸 어떡해. 우선 외모가 내 취향이고 대화도 재밌어. 그런 사람 흔치 않잖아. 본능은 그를 원하고 있는걸. 하지만 관계를 지속해 나갈수록 나만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할걸? 그래 맞아... 어떻게 찾은 이 마음의 평화를 네 손으로 무너뜨리고 싶니?
오늘도 나는 이 글을 쓰며 다시 한번 그를 떠올렸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에 대한 기억은 미화되어 더 소중해지고 만다. 어찌 되었든 그에게 고마운 점도 있다. 설레는 감정을 오랜만에 느끼게 해준 것. 잠시나마 재밌었다는 것. 또, 사람을 유혹할 때는 엄청나게 들이대다가 막상 본인이 딱 연락을 끊어버리면 상대방은 안달 나버린다는 것. 30대가 되어서야 연애, 유혹의 스킬을 배웠다. 다음에 꼭 써먹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관점을 바꾸면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재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 뒤에도 그의 소식이 궁금하고, 연락하고 싶어지는 걸 참을 수 없어지면 그때는 다음 편으로 돌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