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현중 Jul 29. 2021

축구의 왕 - 야야 투레

축구선수 이야기 #2

06-07 시즌이 종료되고. 바르셀로나는 야야투레를 영입한다.

'제 2의 비에이라' 영입 이라고 뉴스의 헤드라인이 장식되기도 했다.

(그렇다. 내가 혼자 설레발 치면서 닮았다고 하는게 아니라, 당시 이 남자의 호칭이 제2의 비에이라 였다.)


그가 바르셀로나에 입단할 시기, 

당시 바르셀로나는 

수비라인에 푸욜이 버티고 있었고,

흑표범 에투의 기량이 절정에 당도한 시기였고,

메시의 등장, 명콤비 이니에스타 - 샤비라인도 구축되기 시작한 시기며,

미드필더에서 다양한 공격자원으로 활용되던 데쿠 등 도 있었다고는 말 할 수 있고..


뭐 아무튼 간에 그보다 중요한건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 호나우지뉴가가 무자비하게 챔스고, 리그고 뭐고 씹어먹던 시기다.


하지만 투레 영입이 큰 임팩트를 주지는 못했다. 그때까지는 그의 형 콜루 투레가 더 유명했고, 1화에 이어 또다시 등장하게 되는 태양왕. 앙리가 같이 바르셀로나로 이적해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더 화려한 것에 시선을 둔다.


앙리 이적 전 즈음에 바르셀로나에 등장한 히트 상품이 몇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적 상대를 두고 그 사이에서 탁구를 치듯 공을 주고받으며, 점유율을 높이는 축구.


'티키타카' 였다.


짧은 패스는 그 짧은 궤적과 다르게 큰 임팩트를 주었다. 그것은 축구판의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시간이 좀 흘러 우리가 비로서야. 잇몸의 주인 호나우지뉴. 그가 외계인이 아니라 사람인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된 시기가 되자. 그라운드의 작은 거인들 친구들 '메시', '이니에스타', '샤비'가 다른 선수들은 그냥 옵션으로 느껴지게 할 만한 경기를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무기는 티키타카!

메시를 앞세워 챔피언스 리그 우승. 다시 세계축구는 바르셀로나의 이름 아래 놓인다.  분명 그 사이에서도 야야 투레는 좋은 선수 였다. 그러나 바르샤식 티키타카에서 왠지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은 분위기 였다. 09-10 시즌에 결국 야야투레는 바르샤 유스 출신인 부스케츠에게 수비형 미드필더 주전을 밀리게 된다. 그리고 야야 투레는 자신의 위치가 아닌 수비수 로도 뛰게 된다.


많은 관계자들은, 당시유로우승, 월드컵 우승을 하던 스패인커낵션에서 밀린 것이라고 말했다. 추측해 보건데, 그때 야야투레는 그게 좀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그리고 비유럽 선수로 상대적 박탈감정도를 느끼고 있었나보다.


구단과 야야투레는 그래도 큰 잡음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쪽의 의견이 일치했다.  다니엘 알베스가 측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하능한. 마르퀘즈도 있었기에.  바르샤에서도 많은 팀에서 오퍼가 들어오는 '야야 투레'를 내보낼 준비를 하기시작한 것이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는 2008년도 부터 오일머니로 무장한 만수르가 신나게 선수들을 사 모으고 있을 때 였다. 그 선수들중엔 야야 투레의 친 형인 콜루 투레가 있었다. (이 콜루 투레도 아스날의 왕 비에이라의 심복 중 한명이었다.) 콜루 투레는 맨체스터 에서 동생과 함께 뛰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길 언론에 퍼트리더니. 결국 맨씨는 2010년 냅따, 야야투레를 2400만 파운드(약 440억원)에 거의 꽁짜로 줏어 먹는다.


440억이 누구집 개이름이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당시 공개된 자산이 35조 가량하는 오일갑부 만수르의 집 개 이름이 5,000억 정도 할테니.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자. 또 요즘엔 1000억 정도 하는 몸바도 많으니, 시기를 염두해도 상대적으로 야야 투레가 엄청 싼 가격이라 하겠다.


그렇게 2010년에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 야야투레. 


비에이라와, 콜루 투레.


그는 자신의 롤 모델로 불리던 자와 자신의 친 형과 함께 한팀에 몸담게 된것이다. 

(먼저 오일머니 구단에 합류해 있던 콜로 투레는 동생과 다르게, 자리를 차지 하지 못하고. 꿔다놓은 보리자루 신세가 되었다가. 리버풀로 홀연히 자유계약으로 이적해 우승 대결을 펼쳤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는 이적을 한 뒤, 등번호를 선택하게 되는데. 

참고로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자신의 백넘버로 사용했던 번호는 24번이었다. (이때는 아내의 권유가 있었다고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그가 이적할 당시 그가 사용하는 백 넘버 24 번을 맨체스터 시티에서 달고 있는 사람은 예전 자신을 제 2의 비에이라라고 불리게 한 장본인.


'패트릭 비에라' 였다.



운명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 선수로써 황혼에 접어든 패트릭 비에이라는 이적후,  다른 선수들에 밀려 자신이 원하는 번호를 선택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번호 24번을 선택한 것인데, 그 번호가 자신을 닮은. 제 2의 비에이라라고 불리운 사나이의 번호였던 것이다. 


결국 투레는 자신이 사용하던 백넘버를 원한다 하지 않고 않고, 전설에 대한 예우로 24번이 뒤집힌 42번을 택하게 된다.


비에라와 야야투레, 갓데발도 보이네용


이적후 시작된 리그 10-11리그 우승은 리그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맨체스터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는 맨유의 벽을 넘지 못한다.


다시 시작된 11-12리그. 우승다툼을 시작하는, 하나의 도시, 두개의 팀. 맨유와 맨시. 11-12리그는 맨유와 맨시의 우승다툼이 볼만한 시즌이었다.  결국 마지막 경기까지 알 수 없는 우승의 향방.

리그 우승은 리그 마지막 경기의 결과로 판가름 나게 되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경기를 펼치는 1위팀과 2위팀.

프리미어 리그의 우승팀은 그 서로 다른 경기의 향방에 달려 있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득점, 다시 역전.


그리고 다시 역전의 역전.


11-12년 epl의 우승팀은 결국 그가 중심에 있는 맨체스터 시티에게 돌아가게 된다.


맨체스터시티로써는 44년만의 리그 우승. 팀을 우승으로 이끈 그는 리그 베스트 11에 뽑히게 된다. 



그러나 그당시 아프리카 축구선수들은, 인지도에서 유럽이나 남미의 선수들에 비해  실력대비 유명세를 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2014년 영국 캐피탈 컵에서 우승을 한 직후(그는 이게임에서 득점을 성공시켰다.)


그의 동료 나스리는, 


"투레가 아프리카 출신 선수가 아니었다면,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로서 모두의 인정을 받고 있을것."


이라고 밝혔고, 이에 야야 투레 스스로도


"이 문제에 관해 사실 그리 심각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지도 않고, 이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난 그저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어느 지역에서나 리오넬 메시를 알지만,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야야 투레를 알진 못한다. 혹자는 도대체 야야 투레가 누구냐고 물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 이름은 알지 몰라도, 내 얼굴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리오넬 메시의 얼굴은 정확히 안다."

고 말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 연속으로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 아프리카 최고의 선수로 거듭났던  야야투레. 그는 분명 아프리카 최고 선수를 넘어서, 3세계 축구선수의 편견을 넘게하는 역할을 해준 또다른 '축구의 왕' 이었다.





축구의 왕 끝.


에필로그)

그가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올해의 아프리카 선수상은 다른 선수가 독차지 해왔다.

그와 월드컵을 같이 뛰었던, 검은 신이라 불린 사나이. 

- 신이라 불린 사나이로 이어집니다.



*구독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축구의 왕 -  파트리크 비에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