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에서 우울증이 온전히 회사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은 우울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냥 평상시 다운되어있는 아이, 시키는 일은 잘하지만 상처가 무서워서 전진하지 못하는 아이, 상처투성이 아이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해주시라.
자세히 말하기는 지면이 작지만 남들이 겪는 부모님의 사업실패, 가난, 따돌림 같은 일들을 고루고루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나름 성장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작은 일들도 결국엔 잊히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있더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떠올리며 이불을 차고 눈물을 흘리고 삶에 대한 기대가 없고, 그게 나였기에 언제 어디서 우울증에 빠지더라도 크게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울해’와 ‘우울증’은 음절 하나의 변화보다 더 큰 문제였는데, 내가 나를 병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울해’는 그냥 나의 당시 상태였고, 언제든 무슨 일을 찾아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우울증’은 어떤 자극을 주어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내가 아프다는 걸 인식하고 나니 세상을 조금은 더 편하게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다 내가 언제 죽을지(자살이든 타살이든 사고사이든) 모르는데, 알게 뭐야? 그냥 내키는 대로 할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우울증이 나에게 준 긍정적인 면이라고나 할까.
내가 우울증에 걸려 약을 먹는다는 사실을 가족들도 알게 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가족들은 다행히 나에게 대화를 시도했고, 나는 거리낄게 줄어든 만큼 더 많은 속 얘기를 하게 되었다. “엄마, 병원에서 입원하는 건 어떠냐고 하더라” 평소였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을 며칠을 망설였지만 할 수 있게 된 순간. 나는 내 삶에서 어떤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았다. 그런 변화들이 나를 (퇴직을 위한) 휴직에 이르게 했고, 그 덕에 나는 이렇게 글을 쓸 시간도 생겨서 나를 돌아보고 있으니, 우울증 마냥 거지 같다고 할 수만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울증은 이미 나의 일부이기에 내가 어떻게 한다고 뚝 떨어져 남이 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나는 그냥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세상에 많은 우울증 친구들이 나를 보고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우울증은 내가 겪어본 바로는 혼자서 이겨낼 수 없다. 옆의 누군가의 작은 도움이라도 있어야 누웠다가 앉을 수 있고, 일어설 수 있고, 걸어낼 수 있다. 그러니 언제든 연락을 주시라. 나라도 힘이 된다면 작은 글 몇 줄이라도 보내 드릴 시간이 충분한 사람이니. 그리고 죽고 싶더라도 하루만 더 사시라. 내일 죽어도 되는데 굳이 오늘이어야 할 필요 있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