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다. 3년 전 1억5천만 원의 돈이 사라졌다. 3일간 아무런 의심 없이 현금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갑자기 사기 피해자 되어 경찰 조사를 받았다. 모든 것이 꿈 같았다. 이것은 꿈이라며 악몽에서 빨리 깨라고 머리를 벽에 ‘쿵쿵’ 박았다. 피해액을 정리하고 갚을 돈과 이자를 계산하는 순간,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 문제는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보이스피싱은 사회악이다. 모든 것이 전화기 너머로 사라져 실체가 없다. 감정은 대상이 있어야 한다. 실체가 없는 분노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하게 마련이다. 바보 같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어처구니없는 나의 행동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으니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았다. 사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불쑥불쑥 치고 들어오는 다양한 변수들은 나를 시련에 빠트리기도 하지만 맷집을 단련시키기도 한다. 강력한 역풍은 ‘극복’보다는 ‘포기’라는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삶을 포기한다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아이들,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아직도 잃을 것이 많았다.
거센 비바람이 나를 향해 휘몰아칠 때는 튼튼한 우산으로도 피하기 쉽지 않다. 우산을 똑바로 쓰려 해도 이리저리 흔들려 비를 맞기 십상이다. 강한 바람에 뒤집히면 우산은 망가지고 머리를 타고 빗물이 흘러내린다. 지나고 보면 우산을 쓰기보다는 비바람을 그냥 맞는 것이 더 현명해 보였다. 어차피 맞을 비를 우산으로 요리조리 피해봤자 이미 옷은 젖고 있었다. 결국, 옷을 버렸는데 이리저리 몸만 부산스러웠다. 정신을 가다듬고 비를 피할 곳을 찾는다.
’카페에 들어가 뜨거운 차를 마실까?‘
’그대로 비를 맞고 집으로 뛰어가 샤워를 할까?‘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을 하며 뛰게 된다. 위기를 모면하려면 정확하고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섣부른 판단이 더 위험한 상황을 만들기도 하지만 결국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는 알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어느 날,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욕이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고 싶다”
“나를 죽여버리면 좋겠어.”
대부분 감당이 안 되는 고통을 겪으면 ‘죽고 싶다’라고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죽고 싶다가 아니라 죽이고 싶다니 이건 또 어떤 말일까? 어떤 마음의 상태가 나를 죽이고 싶다는 것일까?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행위는 단호하고 적극적인 자세다. ‘죽이고 싶다’라는 분노의 방향을 안이 아닌 밖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타인을 대하듯 그냥 나를 죽이면 되는 것이다. 나를 대상으로 여기게 되니 감정도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향하던 분노가 밖을 향하게 되니 억울함과 슬픔이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엾어졌다. 비워진 자리에 그렇게 연민이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