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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연 Jun 03. 2019

요청할 땐 당당하게, 줄 때는 아낌없이

[일상에서 낚아올린 통찰]  05.

돈이 없다. 지갑은 텅 비었고, 당장 먹을 것을 살 수조차 없다면?

그대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얼마 전,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기획피디의 후배로, 취업이 되지 않은 세월이 오래된 탓에 스스로 고립을 자처했다고 한다. 하도 연락이 되지 않아 친구가 찾아갔을 때, 그는 작은 원룸에 쓰러져 있었다. 일주일을 넘게 굶었다고.     


응급실에 옮겨지고, 안정을 취했다. 연락을 받은 선후배와 동기들이 십시일반 모아 병원비를 냈다. 그리고 한 달 정도의 비상식량을 바리바리 싸서 안겨주었다.      


그는 그렇게 굶고 있을 때, 부모님의 연락이 오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엄마, 괜찮아. 나 잘 지내.”


그리고 주린 배를 물로 채우고 버티면서, 그는 어떤 절망에 빠져 있었을까. 서울의 이름만 대면 부러워할 대학을 나왔지만, 그는 삼각 김밥 하나 살 돈이 없었다. 모든 것이 씨가 말랐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그는 애써 괜찮은 척 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30년 전 이야기가 아니다. 국민소득 3만 달러라는 대한민국에서 현재 벌어진 일이다. 그 돈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몇몇의 부자들이 한 달에 한번 횡성에서 소를 잡아 집으로 배달시키는 동안 누군가는 굶고 있다. 진짜로 배를 곯고 있다.     


무언가 제대로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모두가 가난했던 우리 부모님 시절이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자동차를 사지 못해 쓰러진 것이 아니다. 먹을 것을 사지 못했다.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과연 사회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은 ‘우리’다. 국가나 사회라는 개념에 모든 탓을 돌려버리면 우리는 비판만 하면 된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제로 있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일단 그것을 잊지 말자.      


- 일을 했어야지! 편의점 알바를 하든지, 막노동이라도 하면 왜 굶었겠어?      


당연하게 나올 타박이다. 그러나 그가 일하지 않았을까? 그가 월세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은 최소한 그는 월세를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휴대폰이 정지되지 않았다는 것은 최소한 그는 통신비용을 지불했다는 의미다.


그는 분명히 일을 했을 테고,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순으로 돈을 지불하고 보니 아낄 수 있는 것이 식비였을 뿐이다. 하루에 하나 삼각 김밥으로 버티면서 서른밖에 되지 않은 청년은 그렇게 서서히 영양실조 상태가 되어 갔다.      


알바를 많이 하면 최소한 굶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취업을 하고 싶었다. 공부를 해야 할 시간이 확보되어야 했다. 그러니 알바를 많이 할 수 없었을 테고, 몸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된 것이 당연하고, 급기야는 일도 공부도 할 수 없는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우리에게는 ‘이웃’이 사라졌다.

오래 전, 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로 살았던 시절에는 최소한 한 동네에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가 누군지 알고, 그 집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았던 그 시절에는…. 빚은 갚아 줄 수 없어도, 그가 굶어 쓰러지게는 만들지 않았다.      


이 슬픔과 절망은 그의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책임감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 아들이 우리 딸이 저 대도시의 추레한 원룸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울고 있을지 모른다. 내 언니가, 내 동생이 막막한 벽 앞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리고 전화를 하면, “괜찮아. 나 잘 지내.”하고 공허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다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하나도 괜찮지 않다. 진실은,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      


어떡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는, 우리의 연결성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섬처럼 보인다. 각자의 몸으로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섬은 바다라는 거대한 매개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몸과 마음은 우리 개인의 것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바다처럼 크고 넓어서, 다른 사람의 영혼과 섞여 있다.      


극도로 화가 난 사람이 있으면, 내가 방금 이 방에 들어왔다고 해도 그 방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걸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단지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각각의 영혼은 사슬처럼 연결되어 이어져 있다. 그래서 밝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든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나면 진이 빠진다. 우리의 에너지는 그렇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딘가에서 절망에 빠져 있을 나의 오빠나 동생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다. 가족과 친구의 마음을 살핀다. 지하철에서 만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라도 나는 작은 친절과 작은 미소를 보낼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은 연결되어 있기에, 나의 배려를 받은 임산부는 자신의 공간에 가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것이다. 그 사람은 또 받은 대로 나눠준다.


그렇게 이어진 사랑은 언젠가 어느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굶고 있는 그 청년의 친구나 이웃에게 연결된다. 그래서 그는 도움을 받는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작은 사랑이다.     


‘나비효과’는 명확하게 존재한다.

작은 날개 짓이 거대한 폭풍을 일으킨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힘이다. 한 개인으로 시작된 사랑은 똑같은 사랑을 증폭시킨다.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 왔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는 의지가 지금의 시대를 만들었다.      


노예가 없는 시대. 신분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는 시대. 여자도 사회진출이 자유로운 시대. 우리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빈부의 격차가 줄어드는 시대. 한 개인의 개성이 말살되지 않는 시대. 모두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시대.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존과 안정이 개인에게 주어져야 한다.      


여기서 두 번째 우리가 할 일이 생긴다. 그것은 사회 안전망과 복지를 위해 노력하는 정치집단에 투표해야 한다.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에 가치를 두는 집단.      


우리 몸에 혈당이 높아져 있다. 겉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방치할 경우, 높은 혈당은 당뇨병을 일으키고 종국에 가서는 다리 한쪽이 썩어 문드러져 잘라내야 한다. 눈도 실명해서 앞을 볼 수가 없게 된다.      


사회 속에 방치된 어려운 이웃들은 내 몸 속의 혈당과 같다. 그들을 돌보는 것은 내 삶을 돌보는 것과 같다. 연결되어 있다, 진정으로.      


그들을 돕는 것은 간단하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자. 그것이 가족이든 직장 동료든 아파트 경비원이든. 그리고 다수를 위해 노력하는 정치 집단을 응원한다. 나머지는 신이 알아서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된다.      


굶어 쓰러진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스물한 살 때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 처음으로 대학 근처에 옥탑 방을 얻어 독립했다. 부모님에게는 딱 보증금만 도움 받았다. 월세며 생활비 일체를 나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일주일에 4일 동안 과외를 했다. 겨우겨우 살아낼 정도의 돈을 벌었다. 하지만 가끔 과외가 끊겼을 때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곤 했다.     


“5만원만 보내줘. 생활비가 떨어졌어.”     


누구에게 한 전화일까?


친구다. 그 정도는 보내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친한 친구. 그녀는 그날 바로 내 계좌로 돈 10만원을 보냈다. 요청했던 것보다 더 많이.     


또 이런 경우도 있었다. 20대 중반, 일찍 결혼한 친구 결혼식에 갔을 때 축하하러 온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원씩만 걷어줘. 돈이 한 푼도 없어.”     


친구들은 멈칫 놀라며 나를 봤다. 생글거리며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내게, 주섬주섬 만원씩을 꺼내 주었다.      


“고마워. 다음에 진짜 근사한 술 사줄게.”     


나는 돈을 빌릴 때 언제나 당당하게 요청했다. 마치 맡겨놓은 것을 내놓으라는 태도로. 그러면 상대방은 별다른 주저함 없이 나에게 그 돈을 주곤 했다.      


이럴 수 있는 것은 첫째, 나와 상대방 사이에 그 정도의 신뢰가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빌려줘도 틀림없이 받게 되리라는 신뢰. 혹은 그 시기가 많이 늦어지거나 못 받게 되더라도 이 정도의 돈은 나를 위해 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묵언의 애정이 그 안에 있었다.     


둘째는 나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었다. 돈이 없는 것은 지금이지 인생 전체가 아니다. 나는 발전할 것이고, 이 정도의 돈은 충분히 갚을 수 있을 거라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가난한 청춘을 지내왔지만, 한 번도 굶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후배들이 술을 사달라고 하면, 주머니 속에 남은 생활비 3만원을 아낌없이 꺼내 술을 사주었다. 행복하게 마셨다. 나를 믿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믿었다. 그리고 내가 믿는 대로 내 삶은 펼쳐졌다.     


드디어 작가가 되었을 때, 남동생이 보험설계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녀석을 위해 한 달에 20만원이라는 보험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은 매달 꾸준한 수입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서, 1년이 지났을 때 그 보험금을 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보험을 해약하면서, 잠시 생각했다. 이 돈은 미래의 내 몸을 위해서만 쓰였던 돈이다. 어차피 카드에서 결제된 것이고, 이 돈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써 보자. 그길로 바로 컴패션과 월드비젼에 나누어 해외와 국내 아동 후원 결연을 맺었다. 그리고 이런 잔망스런 생각도 했다.     


- 신이 있다면, 아이들 한 달 생활비가 내 카드로 결제되니 내 카드가 끊길 일은 없을 거야.     


매달 20만원. 당시 나에게는 큰돈이었다. 30대 중반에 시작된 이 후원은 10여 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 나는 12년 동안 드라마를 쓰지 못했다. 당연히 수입이 없었다.


그런데도 한 번도 그 후원을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내 카드는 그 이후 단 한 번도 정지 당해본 적이 없다.      


10년 동안 함께 살아온 친구가 나에게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다.     


- 내가 별로 널 인정 안하는데, 그 힘든 와중에도 그 후원을 끊지 않은 것은 인정해.     


나는 가난한데, 풍요롭다. 이 아이러니를 디테일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갑자기 고모를 통해 아파트가 생기고, 돈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내 필요가 충족되어 진다. 마치 누군가 모든 것을 살피고 있다가 눈앞에 슥, 밀어 주는 것 같다.     


나는 아깝지 않다. 내 친구들과 함께 먹는 밥과 술은 누가 내도 상관없다.


나는 전혀 아깝지 않다. 지하철과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걸인들에게 작은 사랑을 나눈다. 일부러 천 원짜리를 챙겨 다닌다. 그분들을 만나면 꼭 주려고. 그리고 생각한다. 언젠가 만 원짜리가 이 천원짜리정도의 가치가 되는 풍요가 나에게 올 것이라고.      


10년 전, 가난하고 힘든 몇 년을 보내다 대만 드라마 계약을 하면서 4천 만 원이라는 목돈이 생겼다. 그때 나는 5백 만 원을 뚝 떼어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다. 내 수입의 10%는 다른 사람을 위해 쓰리라.


아니, 그것은 애초에 내 몫이 아니라 그들의 몫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풍요는 나 혼자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 나와 함께 일하지 않았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돈.


번화가의 빌딩이 비싼 이유는 건물주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거리를 지나갔기에 가능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면 그 빌딩의 가치는 하락한다. 아무도 오지 않으면 그 빌딩은 폐가가 될 것이다.      


모든 가치는 이렇게 높아진다. 누군가 나를 찾아주지 않으면 가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만들어 간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풍요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다른 이들을 위해 나뉘어 쓰여야 한다. 많은 것은 필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세상에 되돌려 주면 충분하다.     


“괜찮아. 나 잘 지내.”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가 되게 하는 삶.     


“괜찮아. 나 정말 행복해.”     


기쁜 목소리로 수화기 저 편 부모님께 진심이 전해지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은가?      


자신을 믿자. 그리고 노력하자.

애쓰다 쓰다 정말 힘들 때 요청하자.

당당하게.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친구와 지인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대가 아무리 적게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나누어 아낌없이 줘라.

당신이 이렇게 주는 사람이 되었을 때, 당신은 더 많이 받는 사람이 된다.     


그대가 줄 수 있는 것은 돈뿐이 아니다. 미소도, 친절도, 작은 배려도 모두가 줄 수 있는 것들이다.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찾아내라. 많다. 당신 안에 좋은 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것을 발견할수록 당신은 스스로를 좋아하게 된다. 그대가 그대를 사랑할수록,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한다.      


삶은 그렇게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성장한다.

그대가 삶을 만끽하게 되기를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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