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실패했던 이유.
[일상에서 낚아올린 통찰] 06.
‘기생충’을 보고 왔다.
봉준호 감독의 어떤 영화는 좋았고, 어떤 영화는 싫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참 좋았다. 크리에이터가 발전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도 그 중의 한사람으로서 많은 부러움을 느끼고 왔다.
아무튼 오늘의 글은 영화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기생충’ 중, 한 대사로부터 다른 이야기를 하려한다.
아들이 묻는다.
“계획이 뭐예요?”
아버지는 이런 요지로 대답한다.
“무계획이 최상의 계획이야.”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계획에 미치기 시작했다. 오래전 프랭클린 플래너의 열풍을 시작으로 매일, 매주, 매월, 매년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체크해 가면서 자신의 일상을 점검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루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람들을 계획으로 내몰았다.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순간에는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고 착각했다.
그러다 3일쯤, 일주일쯤, 혹은 한 달이나 석 달을 해내다가 슬며시 플래너는 서랍 속에 짱 박히거나 책상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간다. 그리고 자조석인 한마디를 내뱉는다.
“내가 그렇지, 뭐.”
이런 자조는 자신에서 삶으로 확장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대부분의 사람들이 딱, 이정도 선에서 자신과 환경과 삶에 타협하면서 멈춰 선다. 대부분 지루하고, 가끔은 끔찍하고, 어떨 때는 화가 치솟아 오르는 일상이지만, ‘사는 게 별거 있나. 이렇게 소주 한잔 마시며 푸는 거지.’ 하며 힘겨운 오늘을 애써 위로하며 넘긴다.
나는 플래너의 한 달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오래 전, 두어 번 시도해보고서 말았다. 촘촘히 계획을 세워 매일을 쪼개며 사는 일은 나와 맞지 않았다. 나는 한없이 게으르게 늘어지는 쪽이다.
애초에 ‘nine to six’ 생활이 싫어서 취업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빨더라도 자유가 중요했다. 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당연히, 졸라, 고생했다.
내가 마흔을 넘겨가는 즈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아파트를 넓혀가며 안정을 찾아가는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어떻게 지내?”
친구의 물음에 내 대답은 산뜻했다.
“행복하게 잘 지내.”
“네가 행복할 일이 뭐가 있어?”
부지불식간에 나온 말이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없고 작가로서 큰 성공도 이루지 못한 채,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듯 보이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도 뭔가 잘못 말했다고 느꼈는지 얼른 다른 화제로 돌리긴 했지만, 나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 친구야. 그래서 넌 지금 행복하니?
아주 가끔 그 친구를 만날 때, 우리가 친구였던 초등학교 때의 발랄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성인이 된 후 그녀가 까르르, 웃는 것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자신의 미래와 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어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석회화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자주 재단했다. 완고하게,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판단했다.
또 다른 대학 친구는 내 관점에서 보면 부자다. 서울에 30평대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임대를 위한 오피스텔도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신축 아파트 분양권을 매수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단골 멘트는 이것이다.
“돈이 없어.”
이제는 쉰이 코앞인 나이에, 그녀 부부는 단 한 번도 새 자동차를 사지 않았다. 언제나 중고를 골랐다. 얼마 전에도 10년 넘게 운행한 중고 자동차가 퍼져 버렸다. 또 다시 중고차를 알아보는 그녀에게 나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그럼 네 평생에 언제 새 자동차를 가져볼 건데? 70살이 돼서? 아니면 80? 그때는 면허증을 반납해야 할 나이인데?”
잘 알고 있다. 누구나 소유에 대한 가치가 다르다. 새 자동차 보다 괜찮은 중고차를 고를 눈만 있으면 중고차도 훌륭하다, 아니, 자동차 자체를 소유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늘, 돈이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바탕 생각. 그래서 자신이 누릴 것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그녀의 태도. 집이 몇 채가 되어도 마음 속 그녀는 늘 가난하다. 그래서 좋은 것을 누릴 수 없다고 여긴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천차만별이다. 그것은 전혀 상관없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든, 계획을 세워 밀어붙이는 쪽이든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살던, 돈이 많던 적던, 내성적이던 외향적이던, 다 괜찮다.
문제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은 행복한가? 기쁜가? 설레는가? 꿈꾸고 있는가? 웃음이 터져 나오는가?
무엇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이상이 있는가?
당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외침을 들어본 적이 언제인가?
원래, 산다는 건 이런 것이다.
삶이란 별거 없는 게 아니라, 별거 투성이다. 살아 있다는 충만함은 찾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발견된다. 선을 긋고, 자신과 삶과 타협하며 사는 동안에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행동한다. 안정감을 가지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고시원에 처박힌다. 성공하기 위해 좋은 대학을 가야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려고 준비한다. 외롭지 않기 위해 연인을 갈망하고 많은 이성을 만날 기회를 추구한다.
모두가 같은 길을 걷지만, 소수는 성공하고 다수는 길 위에 멈춘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이나 멈춘 사람이나 그 안의 감정은 똑같다.
- 행복하지 않아.
왜 일까.
이유는 하나다. 방법이 잘못되었다.
결과에 집중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실패를 담보로 한다. 그 안에는 목표만 있고, 과정 속에서의 기쁨과 행복은 사라지고 없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과, 중요하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당신이 그것을 원했던 그 이유.
그 애초의 의도.
왜 돈을 벌려고 하는가?
정말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인가? 집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겠다면, 정말 먹고 살기 위해서인가? 일 년에 한두 번의 해외여행은 또 어떤가? 아니면 결혼하기 위해서인가?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인가? 성공해서 돈을 벌어 위의 것들을 하려고? 아니면 남들보다 우뚝 서고 싶다는 열망인가?
그대에게 질문하고 싶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를 바란다.
당신에게는 그것을 ‘왜’ 원했는지 당신만의 이유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세상이 말하는 답 말고, 당신만의 답.
그대의 열망, 그대의 뜨거운 감정, 그대의 소망이…….
나는 대답이 있다. 그것은 ‘재미’였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진로를 결정할 때 내 삶을 결정한 것은 하나였다. 직장에 다니는 일은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잘하는 것 중에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고민했고, 그 결정이 글을 쓰는 일이었다.
나에게 재밌다는 건,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을 대변하는 단어다. 하지만 작가 지망생 시절부터 데뷔하고 나서 오랫동안 그것을 잊어버리고 지냈다. 어느 순간부터 재미있을 것 같은 글 쓰는 일이 작가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글을 쓰는 기쁨과 행복은 개뿔. 제작사와 방송국이 좋아할만한 글이 뭘까를 고민하면서, 내 안의 즐거움과 기쁨은 전기 청소기가 흡입해 버리듯 사라져 버렸다.
애초의 의도가 사라진 상태는, 나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성공할 수가 없다. 나는 성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나는 그냥, 나 자신으로 있어야 한다. 언제나.
내가 수단이 될 수 없듯이, 현재도 수단이 될 수 없다. 내가 머무는 시간과 공간이 지금이다. 지금 이 순간을 대충 흘려보내는 것은, 나 자신을 흘려보내는 것과 같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애초에 당신이 가졌던 ‘의도’를 기억해라. 그것이 뭔지 모른다면 그것부터 찾아야 한다. 당신의 가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돈이나 직장, 성공에서 찾는다면 그대는 헛발질만 할 것이다. 당신의 의도는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열망하는지 가슴과 영혼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것은 외부에 있지 않다. 세상에 아무리 눈을 돌려도 당신은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 오로지 당신 내면에 잠들어 있다. 당신이 꺼내드는 순간 빛을 발할 그것은.
나는 요즘 다시 글 쓰는 일이 재밌어졌다. 그래서 이 글들을 쓰고 있다. 내가 재밌어하니, 읽는 이들의 반응이 온다. 그들이 내 글에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내가 기쁜 마음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나의 상태를 반영한다. 그것이 삶의 법칙이다.
현재 이 글은 돈이 되지 않는다. 지금 내 통장의 잔고는 비어 있다. 예전이라면 빈 통장을 채우기 위한 글을 쓰려고 아등바등 했을 것이다. 하지만 10년 넘게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나는 체험했다.
돈을 벌기 위해 쓰는 글은 돈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나에게 돈을 가져다 준 글들은 그 작품을 쓸 때 내가 빠져서 행복하게 썼던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알 수 있다. 언젠가 이 글들이 나에게 풍요를 가져다 줄 것임을.
나는 다시는 그 막막한 두려움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애초에 가졌던 의도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행복하므로.
그대에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실패를 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성공하는 법을.
‘의도’는 가지돼 ‘기대’는 하지 마라.
두 단어는 명확히 다르다.
‘기대’는 결과에 집착하는 것이다.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 오는 실망과 불안과 두려움이 우리를 잠식하고 움츠려 들게 하고 땅을 파고 기어 들어가게 한다. 내가 작아진다. 자존감을 훼손시킨다. 그 상태로는 멀리 나갈 수가 없다.
혹은 미친 듯이 애써서 작은 성공을 이룬다고 해도 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이르는 동안 그대는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걷어차 버린 그 소중한 상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의도’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다. 오르고 내리는 삶의 바이오리듬을 이해하고, 작은 실패는 더 큰 도약을 위한 발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 삶에 펼쳐지는 것이 무엇이라도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배울 것과 도움 되는 것을 찾아낸다.
그것은 나를 확장시킨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나의 자존감은 훼손되지 않는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더 크게 성장한다. 당연히 다음 발걸음은 크고 활기차다.
의도는 멀리 본다. 그대가 상상하는 이상이다.
계획은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 다음번 당신이 하고 싶은 일. 당신이 되고 싶은 상태 하나하나에 몰두하다 보면, 삶은 당신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실현시킨다. 그래서 나를 억누르면서 억지로 계획 속에 자신을 집어넣는 것은 나의 의도와 역행하는 결과를 자주 가져온다.
만약 그대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현하는 일상이 ‘정말’ 즐겁다면 그렇게 해라. 그것이 당신의 자연스러움이다. 하지만 반대의 성향을 타고 났다면, 자연스러운 그대의 상태를 즐겨라. 무엇이든 좋다. 핵심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기쁜가, 아닌가 둘 뿐이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다. 우리의 본성은 자연스러움이다.
두려움은 자연스러움을 파괴하는 녀석이다. 그 녀석과 친하게 지내지 마라.
자연스럽게 사는 자신을 처음에 연습할 때, 한도 없이 불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끝도 없이 게을러져서 이대로 살면 망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은 틀림없이 찾아온다. 초보 운전자가 수도 없이 작은 작은 접촉사고를 일으키듯이.
하지만 의도대로 살 때, 우리는 점차 부지런해진다. 매 순간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찾을 때, 활력이 생기고 그것은 나 자신을 기쁘게 독려한다.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이렇게 하는 쪽이 더 즐거운데? 저건 해보니 아닌 것 같아. 오케이, 이 길로 쭉 가보자. 가다 막히면 돌아가면 돼지!
길은, 애초에 만드는 자의 것이다. 남들이 닦아 놓은 길은 편할 순 있지만 모험은 없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기쁨도 없다.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열 수 있다. 용기를 내서 한 발작 한 발작 전진하면 그것이 나의 길이 된다.
그런 와중에 타인의 우려나 걱정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겠지만, 미소를 짓고 부드럽게 말하면 된다.
- 넌 너의 길을 가. 난 나의 길이 재밌으니.
진짜 실패는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잃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잃어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그것을 기억하기만 하면, 우리는 현재라는 매 순간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
숨만 쉬는 시체처럼 살지 않는 삶, 진정한 성공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다음 스텝은, 신께 맡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