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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즐겨 보실래요?

by 오성진

게임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상한 질문이지요? 요새 세상에 게임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있을 리 없지요.

그럼에도 이렇게 질문한 이유가 있습니다. 즐기는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지요.


오늘의 제목은 “스트레스를 즐겨보자”입니다.

스트레스를 즐기다니, 그것 참 별 이상한 말도 다 있다. 이렇게 은근한 분노와 불신으로 제목을 이해하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게임해 보신 적 있는지 하고요. 게임은 하면 할수록 재미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꾸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게임에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동성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심리적인 중독성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신체적 의존에 의한 중독성입니다.

중독을 떠올리면 마약이 제일 먼저 떠오르지요? 마약을 한 번 손에 대면 빠져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중독을 신체적 중독(physiological intoxication)이라고 하는데요,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가 없는 중독입니다. 신체 자체가 중독물질을 흡수하지 않고서는 버티질 못하기 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일이지요. 그래서 마약은 전 세계적으로 규제를 하고 있는 것이죠.


심리적 중독이라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은 법으로 규제하지는 않습니다. 정신적인 의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 훈련으로 충분히 중독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중독의 대표적인 것은 흡연이지요.

그다음은 도박이겠지요?


심리적 중독의 근본은 도전의식 때문입니다. 물론, 담배 피우는 것이 도전의식이 생기기 때문은 아닙니다. 도전의식 때문이라면 오히려 담배를 끊는 일이 되겠지요? 하지만 담배도 일반적인 심리적 중독과 같은 원리로 일어나기 때문에 심리적 중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스트레스는 받아서 좋을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데 즐기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정말로 이 글 쓰는 사람은 4차원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5차원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스트레스를 즐겨보자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더 이상 스트레스로 힘들어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자라는 것입니다. 이기기 쉽지 않은 것을 넉넉히 넘어서는 힘이 생기면 자신감이 커지게 됩니다. 바로 그것을 바라보자는 것이죠.


동물실험을 통해서 도전하는 사람의 호르몬 분비가 규명이 되었는데요, 한 번 성취를 맛보면, 다시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 이유가 도파민 때문입니다.

다시 도전을 하면서, “이번에는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도전을 하는데, 결과는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아니었을 때, 도파민이 쏟아져 나온다고 합니다.

그때, 포기하는 마음보다는 “에잇! 다시 해보자!”라는 마음이 커지는 것이죠.


도박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한번 기분 좋은 것을 경험하고 나면, 다음에는 기대가 커지는 것이죠. 그런데 도전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포기하는 마음보다는 다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도전하는 것이죠..


스트레스를 즐기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스트레스를 넉넉하게 이기기 위해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스트레스의 본질과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입니다.-

스트레스를 이기는 방법이 터득이 되면, 자신감이 가득해집니다. 그때부터는 스트레스가 고통이 아니라 도전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도박과는 달리 삶에 자신감을 가득 차게 해 줍니다.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의 강도는 아주 다양하고, 이것이 스트레스인지 운명인지가 헷갈리는 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것들을 스트레스 즐기기를 통해서 자신의 삶의 양식으로 바꾸어나가는 아주 유익한 일들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스트레스의 본질


나는 브런치 스토리에 스트레스에 관한 많은 글을 올렸습니다. 그렇다고 앞의 글들을 읽으시라고 링크를 걸진 않겠습니다. 배운 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익히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번 이야기 했지? 한번 했으면 알아 들어야지, 네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냐!”


이렇게 질책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질책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자신이 하고 있는 말로 인해서 결과는 점점 나빠져가기 때문입니다.


왜 나빠지느냐고요?

그 사람의 이야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게 돠고, 그 스트레스로 인해서 올바른 판단을 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기 때문 압니다.


스트레스는 사실 우리들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자극이 있을 때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것을 멈추게 되지요.

예를 들면 넘어져서 팔다리를 다쳤다고 합시다. 그런데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요? 아니요, 다치게 되면 건강하게 회복이 되어야만 하는데, 회복하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하고, 가료가 필요합니다.


다친 곳이 화농 하지 않도록 소독을 해야 하고, 혹시 부러지기라도 했다면 고정도 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관리를 해야 하지요.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통증이 없다면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없습니다. 나환자의 손발이 화농해 들어가서 나중에는 손가락 발가락이 없어지게 되는 것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관리를 하지 않아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망가려고 하지 말고, 지금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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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스트레스 속에 싸여 있는데 그렇게 여유롭게 자신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스트레스는 느끼는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똑같은 상황에 있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스트레스의 정도는 전혀 다르니까요. 그것은 단지 각 사람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스트레스에 대해서 훈련이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선택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자각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죠


“네 의견을 버려라. 그러면 ‘피해를 입었다’는 느낌이 사라질 것이다. ‘피해를 입었다’는 느낌이 사라지면 피해도 사라질 것이다”( 주 1)


인간의 소유욕이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면 아마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소유욕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포함됩니다.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은 자신아 아는 것이 없다는 자각으로 어떠한 질책에 대해서도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면 상처받을 자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받는다는 기쁨만이 있을 뿐이죠. 그리고 열심히 배워서 지금 모르는 것을 나의 것으로 하고 나면 당당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는 자신의 의견이 없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 자신의 의견을 버리면 상처받을 것이 사라집니다.


판단하지 마라. 정죄하지 마라.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마치 명령처럼 느껴지지만, 부모님의 가르침이나 마찬가지죠.

“길 건널 때 신호 잘 봐라. 건너기 전에 차가 오는지를 다시 한번 살펴봐”

이것을 명령으로 여길 사람은 없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정죄하지 말거라”

명령이라고 생각되지 않지요? 어머님의 보살피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부모남이 많지 많지 않기 때문에 낯설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부모님이 늘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는 희망적으로 보고 았습니다. 최소한 이 글을 읽으시는 어머니는 어린 자녀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지 않으실까요? 자녀의 마음이 성숙되기를 원하신다면 말이죠.


(주 1)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24. 52페이지의 하단에 실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다. 2000여 년 전의 말이지만, 그는 이미 스트레스를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는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만, 자기가 스트레스라고 판단하지 않으면, 그것이 떠나갈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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