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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진 Aug 13. 2024

의재 허백련의 삶과 예술 자료전 - 2

지난번에는 전시관 1층의 전시물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의재미술관은 1층에서 2층으로의 연결은 계단이 아닌 복도로 이어져 있습니다.

미술관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푸른빛의 유리창이 비스듬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곳이 1층과 2층을 연결시켜 주는 통로입니다.


의재 미술관 전경. 푸른색 유리창 부분이 2층으로 연결되는 복도 부분이다



통로로 들어서면 의재 허백련의 젊은 시절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의재 허백련의 화첩 등에서는 보기 힘든 젊은 시절의 사진이 걸려 있어서, 처음에는 의재의 사진인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눈매를 자세히 보니, 의재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이 사진을 시작으로 의재의 모습들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의재 허백련의 사진들. 첫번깨 사진은 전남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발사를 수여하고 부인 성연옥여사와 함게 찍은 사진.



전시된 의재의 사진 가운데 눈이 머무는 곳이 있었습니다.

25시의 저자인 비르질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의재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광주를 방문한 것입니다.


의재 허백련을 방문한 비르질 게오르규


“동양인은 기술사회를 극복하고 서구의 빛인 전깃불 앞에 굴복하지 않는 슬기로운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 슬기란 <조화의 재능>이지요. 나는 그것을 관현악의 지휘자 같은 재능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서양인들에겐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성벽을 쌓았고 모든 인간의 재능과 슬기를 그 성벽 안에서만 길러왔던 것입니다. 조화가 아니라 성벽에 의해서 인간의 환경을 주위로부터 단절시키려 한 데 그 비극이 있었지요. 성벽은 도시문명을 낳았고 도시문명은 인간의 오만 그리고 조화의 힘이 아니라 지배의 힘을 낳았습니다. 그 궁극에서 얻어진 것이 기술의 발전이었습니다. - 1974년 한국을 방문하기 전 파리 자택에서 이어령 교수와 가졌던 대담”   K 스피릿 윤한주 기자 (2016.09.08)
출처 : K스피릿(http://www.ikoreanspirit.com)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자는 의재 선생의 삼애사상은 그의 삶과 예술이 딛고 있는 흔들림 없는 땅입니다. 그는 차와 그 정신을 알리고 농촌 부흥에 힘쓰면서 농업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는 한편,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널리 전하고자 끝까지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을 흠모한 게오르규의 의재 허백련의 방문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 정면에 보이는 곳이 1층이다


2층 전시실의 입구에는 의재 허백련의 넉넉한 웃음과 함께 그의 삶을 설명하는 글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2층 전시실 입구에 게시된 사진과 글


의재 허백련의 삶과 예술

우리나라 남종 문인화의 마지막 대가로 유감이 없는 의재 허백련 선생의 일생은 문인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추사 김정희, 호치 허련 등의 옛 문인들을 통해 이어받은 남종화의 전통, 오랜 여행에서 얻은 폭넓은 견문과 두루 익힌 동양의 고전들을 바탕으로, 그는 일찍이 예술가로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시와 서예, 회화는 서로 구분이 될 수 없는 하나이고, 그 진정성은 격조 높은 정신과 올바른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문인의 이상입니다. 활달하면서도 힘찬 필묵과 깊고도 맑은 동양사상 부드러운 남도의 풍취와 시적인 ㅎ흥취를 지닌 선생의 작품들은 문인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를 고스란히 담아낸 그릇입니다. 그 그릇 속에는 우리 민족이 간직해야 할 건강한 정서도 담겨 있습니다.

의재 선생은 그처럼 올곧은 정신과 비범한 예술혼으로 이미 1920년대에 최고의 남종화로 인정받았습니다. 그것은 출발에 불과했습니다. 의재 선생은 손에 쥔 붓을 더욱 단단히 잡고 한결 고아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그는 세속절인 성공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등산에 계속에 은거합니다. 겸허하고 청빈한 사상가로, 계몽가로 거듭난 의재선생의 살은 건강한 실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자는 의재 선생의 삼애사상은 그의 삶과 예술이 딛고 있는 흔들림 없는 땅입니다. 그는 차와 그 정신을 알리고 농촌 부흥에 힘쓰면서 농업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는 한편,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널리 전하고자 끝까지 노력했습니다. 한국성이나 문인 남종화라는 말이 그 의미조차 희마한 오늘날, 의재 허벽련 선생의 예술과 삶은 더욱 빛을 냅니다. 아직도 선생의 향기가 가득 고여 있는 무등산 자락에 지어 올린 미술관이 삶과 자연, 학문과 실천, 개인과 사회가 언제나 조화롭기를 바랐던 의재 선생의 생애에 숨을 불어넣는 자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층 전시실에서 만나는 의재의 화실



기다림 33 x 41.8cm




포도 葡萄 33x 67.5cm


이 작품은 문인화 팔 폭 병풍 중 포도 그림으로, 의재산인 시기인 허백련 50대 때의 작품이다. 농묵과 담묵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힘 있고  분방하며, 함께 쓴 제화 시와 판지 또한 활달하다.

푸른 구름 차가운데 검은 용이 졸고 있어
놓친 구슬 주어 달 아래 돌아오네


왼쪽: 의재 허백련이 사용하던 찻잔, 오른쪽은 의재의 화구




계전다종 10곡병풍 階前多種十曲屛風 93.5x27.8cm




의재 허백련이 해서로 쓴 시병풍이다. 여러 시에서 좋은 구절을 골라 적었다.

섬돌 앞엔 의남초를 가득히 심어 두고
방 안에선 장명사를 자주 올리는 도다
소동파 옛 거사를 떠올려 보노라니
간데없는 천축 땅 옛 선생이시로다
보답을 따지지 않고 착한 일을 행할진저
어이 공명 위하여 독서를 시작하리
누대에 찬란한 건 장군의 그림이요
물과 나무 청화함(맑은 꽃)은 복야의 시로세
대붕도 유월에는 한가한 뜻이 있고
선학은 천년 세월 조급한 모습 없네


산수팔곡머리병풍 山水八曲屛風 1940년대 후반  23x 12cm(x6)


이 병풍은 규모는 작지만 의재 허백련의 산수화풍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팔 쪽에는 각가 두 폭씩 사계절을 표현하였고, 각 폭에는 풍광에 어울리는 칠언 절구 한 구 씩을 적어 분위기를 나타내었다.

성긴 가지 가로 비끼니 물 맑고 얕아
복숭아꽃이 흐르는 물에는 쏘가리 살찌네
발을 걷고 홀로 안자 황정경을 보네
창을 여니 미불의 산수가 그려져 있네
배 가득 공연히 밝은 달빛만 싣고 돌아오네
몇몇 고기잡이 배그림 소게 숨겨져 있다네
부들 돛배는 근심도 없이 추풍에 떠 가네
모든 나무는 다 꽃이 진 다음이네


산수십곡병풍  山水十幅屛風 1958  144.5 x 35.5(x10)


1958년에 그린 산수병풍이다. 사계절을 10폭에 나누어 그렸으며, 각 폭에는 그림과 어울리는 화제를 적었다.

제1폭
눈 내린 차운 숲에 매화가 이미 피었는데
갈바람 불어오니 기러기 떼 비껴 나네
계산은 쓸쓸하고 사람자취 없는데도
임포 처사 살던 고 잘도 물어보는구나

제2폭
건너편 산 봉우리들은 비를 만나 싱그럽고
복숭아꽃 피고 물은 따듯해
푸른빛은 더욱 맑다
뉘 집 고깃배가 한가로이 오가는가
봄빛을 실어을 뿐 사람은 없네

제3폭
푸른 산은 첩첩하니 구름은 평풍처럼 보호하며
구른 나무 그늘 깊어 새들은 스스로 우네
가장 좋은 것은 산사람은 한 가지 일도 없어
발을 걷고 홀로 앉아 황정경을 보네

제4폭
안개 빽빽한 나무에 잠기고 푸른 산 어둡네
물결은 긴 하늘에 말리고 흰 새는 돌아가네
가는 비와 빗긴 바람은 도롱이 삿갓 갖추고
낚시질하던 늙은이는 무슨 일로 돌아오는가

제5폭
처와 아이 몇 이서 그물을 펼치니
조각배가 집이고 물이 마을일세
강남도 강북도 그림 같은 산인데
뱃노래 속에 저녁놀 보내누나

제6폭
관청 말을 달려 세상의 번거로운 일 쫒기를
십 년토록 호수와 강을 봄이 다하도록 지났네
푸른 나무 그늘 짙어져 서늘하지 미는 그친 듯
물가 정자의 글 읽는 사람에게 흥을 보내주네

제7폭
아득한 들길 콩꽃 속에는
어촌의 나무마다 조생감이 붉다
머리 흰 농부 옛 그림 같아
강바람 맞으며 누렁이 끌고 간다

제8폭
푸른 절벽 붉은 벼랑 비가 막 지나더니
흰 구름 붉은 나무 가을이라 변했구나
들 늙은이 나부끼는 지팡이 짚고 가서

제9폭
십리 빈 강에 한 물건도 없거니
도롱이로 누길 가는 늙은 어부 외롭구나
술자리 황어가 풀 익기를 기다리며
스멀스멀 한기 돋는 부들 잎과 마주하네

무술년(1058) 봄에 그리다. 의도인



의재 허백련의 병풍


이 병풍은 의재 허백련의 자택에 있었던 병풍입니다. 화제도 낙관도 없는 풍인데,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의재가 국전 심사위원이었을 때, 찬조출품을 위해서 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5살짜리 손자가 붓으로 점을 찍었습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점이 찍혀서 의재는 '손자와의 합작품'이라고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전에 찬조출품을 하려고 했던 작품이라서 새로 그림을 그렸고, 이 그림은 집에 두었다고 합니다.

그 손자(직헌 허달재)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가로서 활약을 하고 있으며, 현재 의재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서 의재의 예술과 삶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사군자와 산수 四君子. 山水 14.3x 138.6cm



1m 40cm의 길고 좁은 화폭에 사군자와 산수를 이어 그린 것이다. 난과 대나무, 매화 국화를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산수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여름 산은 미점을 써 습윤한 느낌을 살렸고, 이어서 잎이 떨어진 나무 몇 그루로 가을의 정취를 표현하였다.



산수화조화첨 山水花鳥畵帖  30.3 x 20.8cm(x17)



이 화첩은 11점의 산수화와 6점의 화조화가 수록된 화첩이다.
이 작품은 그 중 한 폭으로 선비가 여름날 강에서 낚시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미점과 발묵의 기법으로 여름의 습윤한 풍경을 묘사하였다.
산과 강의 풍경이 친숙하게 느껴져 우리나라 산수를 연상시킨다.

   


특별전의 관람기를 마무리하면서, 의재 허백련의 예술가로서의 위대함 뿐만 아니라, 민족을 향한 사람을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의재미술관 주변은 차밭 등등의 환경을 재정비하여 특화된 공원으로 발전될 것이라고 미술관 관장(이선옥)은 미래의 플랜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분들이 예향 광주와 무등산, 그리고, 의재 허백련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방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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