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요새 일어나고 있는 일보다 기억에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갑자기 그런 추억이라고 할까 역사라고 할까. 잠시 써 보고 싶어 졌습니다.
"엄마! 나 머리 깨졌어!, 엉 엉 엉"
나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어머니가 뛰어나오셔서 건너편의 병원으로 업고 가셨습니다.
집에서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대 여섯 개가량의 돌계단을 걸어 내려와야 했습니다.
우리들은 동네 친구들과 백두건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백두건은 정의의 사자입니다. 악을 보면 참지 못하고 징벌을 하고야 마는 캐릭터입니다..
나는 정의의 사자 백두건이 되고자 러닝셔츠를 머리에 두르고 뛰어다녔습니다.
악당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다가 길가로 튀어 나갔습니다.
악당은 곧 내 손에 붙잡힐 것이다!
그 순간 무엇인가가 내 머리를 두드리는 것 같았는데,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자전거에 부딪힌 것입니다.
정의의 사자 백두건이 처참하게 당한 순간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몇 바늘을 꿰맸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나의 개구쟁이 짓을 그리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걱정을 하셨죠.
그리고 때때로 백두건 이야기를 꺼내시고는 웃곤 하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흔적은 도시의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전쟁이 그렇게 비참한 것이라는 기억이 없습니다.
전쟁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이후는 폐허가 된 곳곳이 복구가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죠.
집은 공장 사택이었기 때문에, 공장 근처에서 자주 놀았습니다.
공장의 벽돌 벽에는 총탄 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때때로 땅 속에서 총알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이들의 부수입이 되었습니다.
탄피는 사탕과 바꿔 먹을 수 있었거든요.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정확한 말이었습니다.
세상은 우리들의 놀이터-
어떤 곳도 우리들의 놀이터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정리되어 가는 속도는 의외로 빨랐습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아직 포장이 안된 곳이 많았고, 차량 통행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들을 불러내기 위해서 뛰어다녔습니다.
"철수야 노올자~~"
부르는 소리에 아이들은 쉽게 모였죠.
자기 이름이 철수가 아니더라도 자기를 부르는 줄 누구나 알고 있었으니까요.
떼를 지어 다니며 자치기 놀이, 말타기 놀이, 술래잡기, 팔방놀이, 딱지치기, 구슬치기 였습니다.
놀이기구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현지조달이었죠.
사방에 놀이재료가 널려 있었습니다.
나뭇조각, 조약돌, 모래, 흙, 풀, 물......
나무 조각은 자치기의 도구로 쓰였고, 쌀을 묶었던 새끼줄은 기차놀이에 쓰였습니다,
신문지는 딱지치기의 재료.
딱지치기는 예산이 필요 없는 완전 공짜였음에도, 서로 친구 것을 따 먹으려고 기술을 개발하곤 했습니다.
딱지를 내려치는 속도와 각도, 손목에 스냅을 주는 타이밍 등등, 기술은 점점 고도화돼 갔습니다.
말타기를 하면 자기가 어떤 역할이 되더라도 상관없었습니다.
함께 놀 수 있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했지요.
이렇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런 시대에 스트레스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지요.
사라지기 시작한 놀이터
우리나라 백성들은 참으로 부지런합니다.
서울과 근교에는 전쟁의 자취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들의 놀이터는 점점 좁아져갔습니다.
좁다란 골목길에서 갖은 놀이를 하며 놀았지만, 몸집이 커가면서 골목은 적당하지 않게 되었죠.
그리고 하나 둘 입시경쟁이라는 사회적 흐름에 따라 놀이터에 나갈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세상이 점점 치열해져 갔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끝나고 합격자 발표가 날 때쯤 되면
전국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특별방송이 시작 되었습니다.
모든 중학교의 합격자 발표가 라디오 방송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상위 중학교의 커트라인은 4개 틀리면 떨어지는 정도로 치열했고,
체능시험에서 턱걸이 한 개가 부족해서 떨어지는 일은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래서 커트라인은 정수로 표시되지 않고 소수점으로 표시되었죠.
"4.5"
우리 시절에 중학교 입시에서 커다란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위 무즙 파동이라는 것이었죠.
내가 중학교 시험을 치렀을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엿을 만드는 재료로서 '엿기름을 사용을 하지요?
디아스타제가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엿기름에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무즙에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합격자발표시의 채점은 '디아스타제'만을 정답으로 채점을 했기 때문에,
무즙이라고 답을 쓴 사람은 모두 오답처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학부모(거의 어머니 들이었겠지만)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결국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이 되어 오답처리 되었던 학생들도 구제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서울시 교육감이 사임을 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무즙사건.
우리나라의 중학교입시의 치열함을 대표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3년 후에는 중학교 입시가 없어지고 추첨에 의한 선발로 바뀌었습니다.
뺑뺑이 시대가 열린 것이죠.
소위 명문중학교라는 것을 없애는 교육정책에 의한 것이었죠.
명문중학교는 없어졌지만, 명문학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