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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무관심 Jul 16. 202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리뷰

악의 평범성에 관한 결코 평범하지 않은 보고서


 

“아. 그 녀석도 군대에서만 안 만났으면 좋은 녀석이었을 텐데…….” 입대하기 얼마 전, 악덕고참을 만나 지독하게 군 생활이 꼬였다며 두 시간가량의 대서사시를 읊어낸 한 선배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군대에서만 안 만났으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 그를 마침 군대에서 만나게 된다. 물론 나의 선임으로. 


부대 최고참은 언제나 그에게 ‘후임 관리’를 지시하였고, 그는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목소리가 작고, 동작이 느렸고, 결정적으로 축구할 때 발이 보였던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에게 집중관리를 받았다. 지독한 관리의 시간 후엔 언제나 두 가지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인간인가. 이 상태로 보건대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인간인가? 이건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 그는 악마의 자식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며칠 뒤, 그가 그의 어머니와 통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된 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엄마. 걱정하지 마. 괜찮아. 응. 고참들도 잘해줘.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도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다. 군에 보낸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가 있으며, 스팸메일처럼 매일매일 편지를 보내는 애인도 있다. 단지 그의 고참들이 그에게 강요하고 또 그 역시 이등병 생활을 함으로써 알게 된 군 생활에 관한 규율이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내는 한 명의 군인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것 역시 이러한 ‘악의 평범성’이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효율적으로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이송시킬까에 몰두했던 아이히만에게서(재판을 성사시킨 이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악마의 징후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악마가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이는 결코 아이히만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아렌트는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한 판결을 결과의 원리에서 도출한다. “비록 8000만 독일인이 피고처럼 행동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피고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며 “피고가 행한 일의 현실성과 다른 사람들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잠재성 사이에는 협곡이 있음”과 “유치원이 아니라 정치에서는 복종과 지지는 동일하다.”라고 지적한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논증은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아이히만’에 대한 경고이다. 우리 모두는 군대에서만 안 만났으면 좋은 녀석임과 동시에 군대에서 만났기 때문에 두 번 다시 만나기 싫은 녀석이다. 아이히만이 3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그는 훌륭한 공무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2차 대전 당시에 게르만 민족으로 살았더라면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아이히만으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진정한 사유를 하지 않고 있다면.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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