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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무관심 Jul 21. 2021

<윤리21>리뷰

가라타니 고진, 우리의 책임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여기 한 명의 육군 병장 A가 있다. 군대에선 모든 병사들이 주특기를 배정받는데, 그는 ‘가만있기’가 주특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슨 일을 해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렇게 쌓여진 잉여시간이 문득 지겨워질 때면 후임병을 괴롭히며 소일을 한다. 그는 말한다. “야 내가 이등병일 때 고참들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휴, 난 완전 천사다. 천사.”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의 육군 병장 B가 있다. 그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을 하며 후임병을 인격적으로 배려해준다. 부대원들 중에는 그가 유니세프에서 파견 나온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다. 그는 말한다. “내가 이등병일 때 너무 당한 게 많아서, 내 후임들한테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했었어.” 

동일한 조건에서 도출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결과. 고진의 논의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섣불리 자유의지를 말하지는 않는 대신,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A병장이 악덕고참이 된 원인을 따져보자. 그가 말한 것처럼 군대라는 특수한 조건 그 자체와 자신이 당한 피해에 대한 보상심리를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B 역시 군대에서 같은 피해를 당했지만 A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 무언가 다른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A와 B가 당한 피해의 수준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 가정환경, 학교생활 그리고 이러한 배경을 잉태한 사회적 구조와 같은 원인들을 찾을 수 있다. 

이 과정은 A라는 개인을 구조의 항목으로 파악하는 ― 고진의 표현대로라면 괄호에 넣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즉 A에겐 자유의지가 없다는 가정 하에서만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B는 안 그랬는데 A만 그런 걸 보면 A가 더 나쁜 놈이라서 그런 것이라는 식의 접근은 A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언정, 결코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해내지 못한다. 이는 B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B가 그런 선의의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B라는 주체를 괄호에 넣고 구조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반면, 책임을 묻는 것은 자유로운 주체를 가두던 ‘괄호’를 벗겨내는 것이다. 책임은 자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개인을 자유로운 주체로 설정한다는 것은 행위 당시 시점에서 그가 모든 원인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에 의해 이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진은 이것을 칸트의 ‘자유로워지라’는 정언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책임이란 우리가 자유롭다고 믿을 때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진은 원인과 책임에 관한 논의를 일본의 전쟁책임으로 확대해 나간다. 그는 전쟁의 최고책임자인 천황이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게 된 구조적 원인을 밝히면서 천황제 폐지를 주장한다. 이는 천황 개인의 책임뿐만 아니라, 천황제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며 전쟁책임에 대해 접근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통해 모든 책임은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는 고진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얼마만큼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 상상하고 있을까? 우리는 얼마만큼 구조의 모순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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