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호와 가능성에 대해서
우리 시대의 영원한 고전, 슬램덩크는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산왕과의 혈전 끝에 겨우 승리를 거뒀지만, 강백호의 부상과 주전들의 체력 저하로 전국대회에서 탈락한 그들의 미래를 아주 잠깐 비춰주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작품의 급작스러운 결말은 적지 않은 실망과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마치 서태웅이 그랬던 거처럼 이노우에 역시 산왕전에 모든 걸 다 쏟아버렸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흔해빠진 스포츠 만화의 공식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가 어떠어떠한 이유로 작품을 그렇게 결말지었다고 어딘가에서 미리 밝혀두었다면 다소 민망한 점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텍스트는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강백호는 이미 천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강백호에게 이끌렸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가 단돈 100원으로 농구화를 샀다거나 여학생들에게 수십 번을 차였다거나 하는 것들도 이유가 되겠지만 결국 그의 가장 큰 매력은 한 경기 한 경기를 거듭해나갈 때마다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가능성이었다. 우리는 자만에 빠진 카자미 하야토를 원하지 않으며,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감만 가득한 바보도 원하지 않는다. 너무나 겸손한 일보는 재미가 없으며, 그 어떤 재능도 없이 우울하기만 한 주인공은 오사무의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족하다. 강백호는 그것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도한다. 무한한 가능성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바보의 쾌활한 자신감으로.
그리고 그 줄타기는 결국 어느 지점에서는 끝나게 마련이다. 그토록 오만했던 강백호의 자신감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것이 입증된 실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잘 모르는 가능성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강백호가 정우성의 실력을 가졌을 때도 지금처럼 '난 천재니까'라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그때는 도저히 그를 귀여워라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의 성격을 윤대협처럼 바꿀 수도 없으며, 그의 실력을 영원히 가능성으로만 남아있게 할 수도 없다.
가능성과 현실화된 재능 사이의 균형은 산왕전을 계기로 무너진다. 그가 숱하게 외쳤던 농구 천재 전국대회 데뷔라는 말의 무게와 만화의 마지막에서 말했던 천재라는 말 사이의 무게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강백호에게 공감했던 것은 그의 천재성이 아니라 그가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존재할지 모르는 그 가능성이라는 것 때문에 그토록 그에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우리는 종종 그 모습에 자신을 투영시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장기의 모습이지, 천재가 되어버린 모습에서가 아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갑과 호주머니를 다 뒤져 겨우 몇 백 원을 만들어 컵라면을 하나 사 먹고 뿌듯해했었던 시절이, 돈 한 푼 없이 편의점에 가서 혹 외상으로 안되냐고 물어봤다가 알바생의 어이없는 표정을 맞이했었던 시절이, 숱한 밤과 숱한 낮을 술로 지새우다 눈물겨운 학점을 받았던 그런 시절이. 하지만 그 시간들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겐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가능성이라는 것들이 조금씩 소진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없어진 것들의 일부는 꿈이 되어버릴 수도 있고, 또 일부는 현실이 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결국 이런 것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래도 가슴 한 구석이 시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