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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무관심 Aug 12. 2021

루이 명박의 브뤼메르 18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이명박 대통령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笑劇)으로. 당통에 대해서 꼬시디에르가 그러하고,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는 루이 블랑이, 1793년∼1795년의 산악당에 대해서는 1848년∼1851년의 산악당이 그러하며, 삼촌에 대해서는 조카가 그러하다.(Marx, 1987:146)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 이명박 대통령이 그러하다. 이 글은 루이 보나파르트와 이명박 대통령 사이의 공통점을 포착하고, 흡사 브뤼메르의 18일을 연상하게 하는 현 정권의 행보에 대한 비판에 그 목적을 둔다. 


먼저 마르크스의 분석처럼 반복되는 역사, 특히 소극이었던 두 번째 역사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와 이명박 대통령은 공통점을 지닌다. 그들은 영웅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광범위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 대통령에 당선된다. 나폴레옹의 조카였던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의 전설과 이름의 힘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나폴레옹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프랑스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고, 국민들의 가슴속에 하나의 ‘전설’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이름은 농민과 군인에게는 질서와 영광을 의미하였고, 상공업자에게는 경제적 번영을 의미하였다. 또한 많은 노동자에게는 사회주의와 대혁명의 계승자로 보였다.(노명식, 1985:239) 제4의 후보자였던 루이 보나파르트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나폴레옹 1세에 대한 향수였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국민들에게 독재자의 향수를 자극한다. 불도저로 대변되는 그의 추진력과 리더십, 그리고 개발주의 정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독재를 연상하게 했다. 민주화 이후 당선되었던 대통령들은 모두 집권 말기의 심각한 권력누수 현상에 시달렸고, 반복되는 레임덕에 국민들은 유약하지만 민주적인 대통령보다 권위적이지만 카리스마 있는 대통령을 추억하게 된다. 이때 이명박 대통령이 나타난 것이다. 자칭 경제대통령인 그는 ‘그분’처럼 자신 역시 경제 하나는 꼭 살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분’의 사진을 보면서 자신과 닮지 않았냐며 환한 미소를 보이기까지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에 이명박 대통령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청년시절,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규탄했던 그의 과거는 말끔하게 지워진 지 오래다. 하긴, 그 누구보다 극렬한 반공주의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한때는 남로당 당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처럼 루이 보나파르트 역시 이색적인 과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보나파르트는 1844년에 「빈곤의 절멸」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사회주의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에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선전 재료로서는 훌륭하게 작용하였다. 6월 폭동 후 프랑스의 공업 노동자도 공화주의자를 깊이 불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까베냑과 라마르틴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빈곤의 절멸」의 저자를 골랐던 것이다.(노명식, 1985;240) 


또한, 여느 보수주의 정권처럼 ‘질서’를 강조하는 것 역시 이들의 공통점으로 파악할 수 있다. 보나파르트의 집권 당시, 프랑스의 농민과 대다수 국민에게는 공화정이란 무질서와 불안정과 중세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보나파르티즘은 질서와 영광과 번영을 의미하였다. 6월 폭동 후 프랑스의 공업 노동자도 공화주의를 깊이 불신하게 된다. 정통파와 오를레앙 파의 경우 보나파르티즘은 변종이기는 하였으나 군주주의라는 점에서 공화주의보다는 자신에게 가깝다고 생각하였다.(노명식, 1985:240) 


이명박 대통령 역시 끊임없이 질서를 강조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소극은 이명박 대통령이 ‘법치’와 ‘법질서 확립’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법치’란 법에 의해 권력을 통제하는 시민들의 정신을 말하는 것인데, 그는 ‘법치’를 외치면서 국민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YTN, 2008. 08. 25) ‘법치’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권력이 곧 법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권력을 통제하는 법이 아니라,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을 통제할 법을 만들 생각에 여념이 없다. 설사 법치와 법질서 확립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법질서라는 말을 집어넣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최장집 교수의 지적처럼 한국에서의 법질서 확립이란 노동자, 윤락업 여성 종사자, 또는 사회적 약자, 정부 정책에 저항하는 집단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최장집, 2008:24) 용산 철거민 사태는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집권 당시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 역시 그들의 공통점이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농민과 군인, 상공업자, 정통파와 오를레앙파, 심지어 공업 노동자들의 지지까지 확보해냈다.(노명식, 1985;240) 그는 600만 표를 획득,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17대 대선에서 48.7%의 표를 얻어 2위인 정동영 후보(26.1%)를 22.6% 차이로 따돌리고 압승을 거둔다.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봐도 서민을 위한 공약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는 서민의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능력 있는 리더로 묘사되었고, 서민들은 기꺼이 反서민적인 정책으로 일관할 그에게 표를 던진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이 모든 것들은 앞으로 설명할 두 인물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 즉 ‘민주주의의 파괴’에 대한 전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법을 만들고 부수고 비껴나갔다. 민주주의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1850년 파리에서 벌어진 세 보선에서 공화파의 압승에 크게 놀랐고, 서둘러 노동자의 투표권을 대폭 감축시키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같은 선거구에 3년 이상 거주한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도록 선거법을 고치는데, 이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자주 이사 가는 약점을 악용한 것이다. 더욱 소극적인 것은 노동자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1851년 7월에 그들의 선거권을 부활시키려 했던 것이다. 대통령실 예산 증액 안이 부결되고, 대통령의 임기를 수정하려는 법안 역시 부결됨에 따라 위기를 느낀 그는 쿠데타를 감행한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헌법을 대폭 수정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하고 선거법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고치고 노동자의 투표권을 다시 회복해주었다.(노명식, 1985:243) 공화국의 이념은 땅에 떨어졌고 민주주의는 유린당했다. 대통령 독재의 권위주의 체제는 1년 뒤에 있을 제정시대의 서막을 연 것이다. 


물론 한국판 브뤼메르의 18일이, 더 근접하게는 이명박의 5․16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판단되지만, 그럼에도 비극과 소극을 오가는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한다. 광우병 사태에서 드러난 정부의 권위주의적 태도는 그 대표적인 예다. 이미 광우병의 과학적 안전성보다는 국민과 소통하려는 정권의 의지, 민주주의에 대한 위정자의 인식이 더 중요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침묵과 폭력적인 진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몇 차례의 큰 고비를 넘기고 국민들의 저항이 무뎌졌을 때 시작된 정부의 반격은 '법질서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또한 KBS의 사장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권을 ‘임면권’ 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언론을 정권의 휘하에 두려는 모습은 군사정권 시대를 방불케 했다. 국가를 기업의 확장판으로만 생각하는 CEO 대통령에게, 이윤추구는 제1의 목적이었으며, 사회적 분배와 이해집단 간의 갈등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촛불은 부러지고 꺼지고 흩어졌다. 일시적인 승리에 고취되었지만, 이후에 엄습해온 것은 좌절과 패배감이었다. 정부는 마지노선을 확인했으며,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중엔 더 이상 그 선을 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제 무엇이 남았을까. 어떤 이는 선거를 기다리지만 루이 보나파르트도 이명박도 선거를 통해서, 그것도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이 된 이들이다. 꼬뮌은 해답이 되어주질 못하며, 대안으로서 등장조차 못하는 형편이다. 루이 명박의 브뤼메르 18일. 그 이브 밤의 어둠은 그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2009) 


□ 참고문헌

노명식. 1985. 프랑스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 까치글방

Marx. 1987.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프랑스혁명 3부작』. 소나무.

최장집. 2008.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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