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릿 우먼파이터'를앞두고 꺼내는 글
어쩌면 이것은 젠더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싸움 구경은 역시 여자들 싸움이라는 말을 듣곤 했다. 어떤 싸움 구경이 재미가 없겠냐만은 일정한 나이를 지난 성인 남자들의 싸움엔 극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여기저기 낭자한 피들과 짓뭉개진 얼굴과 무너진 호흡은, 어쩌면 누군가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맞닿아 있다. 서로에 대한 증오의 크기는 육체적 피해의 깊이로 계량된다. 바로 눈앞에서 드러나는 생생한 살기의 실재가 보는 이들의 몸속에서도 체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들의 싸움을 볼 때는 이러한 두려움이 배제된다. 결국 이 싸움이란 어느 정도의 선에서 끝이 맺어지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서로를 치고 박는 어린아이들의 다툼처럼, 그들 마음속의 증오가 얼마만큼이든, 선을 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 편히 그 모습을 구경할 수 있게 된다.
사회에 진입하기 전 남자들의 세계는 철저하게 힘의 관계로 규정지어진다. 힘의 크기가 곧 자신의 위치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에서 진 남자는 동정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한 패배자로 전락한다. 단 한 번 싸움에서 진 말죽거리의 이정진은 두 번 다시 학교에 나타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관객들 역시 그 이유를 납득한다. 하지만 싸움에서 진 여자는 그렇지 않다. 그녀들의 관계는 힘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로와 격려가 그녀의 주위를 감싸며 결국 그녀는 다시 일어선다.
언프리티 랩스타가 초반에 인기를 끌 때에도 같은 이유라 생각했다. 남자 래퍼들이 지금처럼 디스전을 했다면 거기에는 상대를 철저하게 짓밟아버리고자 하는 살기가 느껴졌을 것이다. 비트 위를 흐르는 승자의 웃음 너머엔 인간으로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만큼의 모멸감을 느낀 패자의 처량이 있다. 끝없는 낙오에 대한 공포가 보는 사람들에게까지 투영될 것이다. 이 싸움을 계속 봐야 하는 것이 점점 거북해진다.
사실, 키썸이 제시와의 대결에서 기대 이상의 랩을 했을 때에도 티머니로 키운 우리 키썸이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 딱 그 정도였다. 온 힘을 다해 걸음마를 뗀 아이를 보는 것 마냥 그 치열함을 마주했을 땐 대단함 보단 기특함이 앞섰다. 무언가 굉장히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어딘가 조금은 어설프고 또 부자연스러운. 틈. 그 틈에 이 프로그램의 재미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오늘, 치타의 코마를 보기 전까진.
90년생. 스물여섯의 치타는 자신이 겪었던 코마를 완전히 들려주고 또 보여준다. 이런 가사, 이런 플로우, 이런 표정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가사와 비트와 마이크. 그리고 치타만이 무대에 남아 있다.(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