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 기억상실

by 다정한 무관심

- 기억의 시작은 몇 살부터였을까. 1984년생인 나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88 서울 올림픽’이 기억나질 않는다. 많은 기억들은 흐릿하고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여섯 살 때부터 조금씩 선명해져 비로소 내가 직접 했던 경험으로 느껴진다. 유아 기억상실증. 3세 이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언어습득이 이루어지지 못해 기억이 휘발된다거나,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해마가 완전히 발달하지 못해서라거나. 3년은 굉장히 긴 시간이라 대부분의 동물들은 이 시기에 어엿한 성체가 된다. 하지만 인간은 3년이 지나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며 겨우 습득한 경험마저도 조금씩 잃어 가게 된다. 어째서 이토록 치명적 결함이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것일까. 어째서 이 같은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 아이가 태어나고 100일이 되기 전까지, 내 머릿속은 어떻게 인류가 멸종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으로 가득했다. 최소한의 수면시간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어른 둘이서도 감당하기 힘든 신생아의 육아를 어떻게 수만 년 동안 지속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일부일처제 핵가족이 인류에게 적합한 것일까. 끝없는 의혹의 연쇄는 유아 기억상실까지 이어졌다. 아 그래서 인간은 기억을 잃는 거구나. 그 시절에 내가 한 행동을 기억하고 있다면 누구도 아이를 낳지 않을 테니까.


-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자란다. 공백으로 남아 있던 최초의 기억들이 조금씩 채워지는 날들이기도 하다. 이 시절이 없었더라면 영원히 몰랐을 순간들이다. 처음엔 나의 부모에게서만 존재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수십 년이 흘러 아이를 통해 헤아릴 수 있게 된다. 기억은 그렇게 이어진다. 누구도 혼자 태어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도 혼자 죽을 수 없다. 시간이 오래 흘러 나의 모든 기억이 희미해지고 마침내 다 사라졌을 때, 이번에는 아이가 그 순간을 곁에서 기억해 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모든 부모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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