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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무관심 Jul 16. 2021

<스카이 캐슬>(2018), 리뷰

이 드라마를 통해 한 가정이라도 살려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아마도 이수임이 등장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작가의 의도가 시청자들에게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 것은. 이 길의 끝이 파국인 줄 알면서도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스카이캐슬의 욕망을 사람들은 막장이라 부르지 않았다. 예서를 지키기 위해 우주가 살인범으로 몰리는 것을 눈 감은 한서진의 선택은 한순간의 내려진 결정이 아니었다. 조금씩 드러나는 진실을 마주하고 감당할 수 없는 선택들을 감당하면서 그녀는 고민했고 분노했고 타협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한편으론 저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차곡차곡, 연출과 작가는 공을 들여 한서진과 그녀를 지켜보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서두르지 않았고 강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한서진이 욕망의 괴물이 되었을 때 누구도 쉽게 그녀를 비난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 마음을 들여다본 우리 역시 공범이 된 것처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이보다 욕망의 줄타기를 잘 해내는 드라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수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겐 훌륭한 인품과 외모를 가진 의사 남편에, 사교육 한 번 없이 명문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아들이 있었다. 보육원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그녀는 남다른 이해심으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우주를 친아들보다 더 아낀다. 드라마 내내 많은 고민을 품었던 그녀였지만, 그것 모두가 스카이캐슬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다. 단 한 번도 개인적인 이익을 두고 갈등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수임은 스카이캐슬의 그 어떤 금수저들보다 완벽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드라마는 주지 않았다. 


딜레마는 여기서 비롯된다. 욕망에 흔들리는 한서진의 삶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그녀에게 공감했지만, 언제나 옳은 말만 하는 수임의 외침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한서진에 대한 치밀한 표현력이 이수임에 대한 동일시를 방해한다. 이수임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사명감과 선한 의지를 표현하려 했지만 그녀가 정의로워질수록 그녀는 시청자들에게 소외되고 만다. 


이수임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차민혁을 통해서는 간접적인 블랙코미디를 연출하며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수임의 목소리는 비껴나갔으며, 차민혁의 과장된 경쟁주의는 오히려 차파국이라는 캐릭터를 드라마의 아이콘으로 만들어주었다. 사실 차민혁을 의도적으로 풍자하는 연출이 아니었다면 냉혹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그의 말 하나하나가 더 아프게 들렸을 것이다. 이 피라미드의 세계에는 지잡대, 지균충과 같은 혐오의 단언들로 넘쳐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의 엔딩을 김주영 선생의 명대사를 빌려 가장 행복한 순간에 망쳐버렸다고 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작가는 이러한 결말을 생각해두고 곳곳에 복선을 깔아 두었다. 그것이 시청자에겐 다르게 수용되었을 뿐이다. 입시코디로 대표되는 현 입시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했지만 오히려 입시코디에 대한 수요가 더 늘어났다. 방안에 또 하나의 방을 만들어 자녀를 가두는 스터디큐브의 비인간성을 폭로했지만, 그 상품은 예서책상이라는 이름으로 이례적인 매출을 기록했다. 작가도 이런 세태가 꽤나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성급한 대안 제시가 오히려 문제의식 자체를 흐리게 만들 때가 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화두로 삼지 않았던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한 편의 드라마가 공론장으로 이끌어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성벽에 균열을 가한 이들이 꼭 행복하게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스카이캐슬을 통해 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한 가정이라도 살리고 싶었던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오히려 작품으로선 가장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것만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좋은 작품의 마지막에 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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