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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Candy Dec 16. 2021

한국의 징병제도

제도와 인식의 관계

'징병제도 재평가'에 올인


다른 사람을 마치 물건처럼 다루던 시대가 있었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미국에서는 1861년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 노예제도를 금지한다는 조항을 포함한 수정헌법이 1865년 통과되었다. 불과 150년 전의 일이다. 제도는 소멸되었지만 차별적 관습은 그대로 사회에 남아 1960년대까지도 버스에는 '백인 전용석'이 있었다. 불과 60년 전의 일이다. 국민이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 방식인 직선제는 1987년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1988년 선거부터 적용되었다.) 불과 30년쯤 전의 일이다. 현재 우리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민주주의 그 즈음 우리나라에 제대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역시 기껏해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현재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참 비상식적이라고 생각이 드는 과거가 있다. 또 그러한 기형적 시대들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나는 한국의 징병제도가 30년 후, 빠르면 20년 후에 돌이켜보았을 때 (그때까지 인류 문명이 지금과 비슷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위에 나열한 예시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으리라고 확신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렇게도 억압적이고 비합리적인 제도가 존재했는지 의심할 것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시스템에 둘러쌓인 채로 살아간다. 사회적 제도를 뒤로 제쳐 두고 한 사람의 인식과 정신세계, 감정, 가치관을 결코 판단할 수 없다. 물론 사람들의 인식이 제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쉽게 보고 느끼지 못하지만 제도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거나 /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본다. 지금 징병제가 제도적으로 용납되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징병제도는 나름 필요한 것 같다는 착각을 다소 심어준다고 믿는다. 결국 미래에는 분명 재평가될 것이다.



막대한 손해


징병제도는 첫째로 인간 권리를 짓밟는다. 법의 최고 층위인 헌법에서 보장하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 중 거주 이전의 자유,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헌법 제 37조에서는 국가의 안전 보장, 질서 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하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까지는 침해할 수 없다고 덧붙여져 있다. 내가 내 몸뚱아리를 원하는 곳에 가져다 놓을 권리, 내 행위를 오롯이 본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할 권리가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본질적이란 말인가?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 않는 행위를 상당한 기간 동안 강제로 행하게 되는 징병제도는 그 자체로 본질적 권리 침해가 맞다고 확언한다. 위 빨간 문장이 글로 쓰여 놓아져 있는 것만 보아도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다.


둘째로 사회적 비용의 막대한 지출이 있다. 금전적으로 국방부의 인력 유지를 위한 비용은 내가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거니와, 관련된 통계를 면밀히 들여다보기에 어려운 점이 있어 넘어간다. 하지만 젊은 청년들이 1년 반 남짓의 기간을 (사회복무요원과 공군 등은 1년 9개월) 상명하복식, 극도로 경직된 조직에서 강제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가늠할 수 없는 사회적 손실이라고 본다. 청년들이 가장 많이 징집되는 나이대인 20세에서 25세의 시기는, 한 인간의 신체와 두뇌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이다. 열정과 도전이 꽃필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이고,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혁신을 꾀하며 나아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시기이다. 20대 초반이란 그런 시기이다. 좋든 싫든 미래 대한민국의 중추가 될 젊은이들에게, 1년 반 동안의 군대 강제 징집은 창조적이고 개혁적인 사고방식을 메말라 죽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며, 보수적이고 경직된 조직 체계에 순응하는 방법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물려주지 않는다. 가령 상급자가 땅을 파라면 땅을 파고 다시 메꾸라면 메꾸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운이 좋아야 불합리한 제도에 곧잘 순응하고 체념하는 법을 터득할 뿐이다. 운이 나쁜 경우 어떻게 해도 이 비상식을 바꿀 수 없다는 자아 불능감에 빠지거나, 비상식적인 문제 해결 과정이 일부 몸에 체화되어 이전보다 더 소극적이고 편협한 인간 유형에 가까워질지 모른다.


징병제도가 유지되는 나름의 이유는 꼽아볼 수 있겠다. 분단 상황이라는 한국의 특수성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정말 그렇게 많은 수의 인원이 징집되어야 하는가 반문해볼 수 있다. 전쟁이나 특수 안보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현대의 무기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과거와 같은 수의 사병들이 꼭 유지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힘을 잃는다. 만일 다음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사일 - 최악의 경우 핵무기들 - 을 기반으로 한 전쟁이 된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나 역시 쉽게 말해서 너희가 왜 끌려왔는지를 설명해주는 각종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렇게나 많은 수의 사병이 필요한 이유를 설득력있게 제시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서 내 나름의 논리적 결론 - 왜 징병제도가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는가에 대한 결론 - 을 내려 보았지만. 여기 적지는 않겠다.


개인적 바람으로는 모병제가 하루라도 빨리 정착되었으면 한다. 한국에서는 미국처럼 모병제 못한다고 미리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바꾸기 힘들어도 바꿔야 한다. 이건 그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너무 소중한 젊은 자원들을 강제로 징집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비합리성과 비효율성이 산재해 있는 현재 한국의 징병 제도를, 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아끼는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물론 북한의 남침을 직접 겪은 시대 사람들의 마음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상흔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조국을 수호한 분들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감사한 마음도 든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인 나이지만, 당시 부산마저 북한에 점령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떠올려 보기만 해도 벼랑 끝에 서있는 듯이 아찔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해서 철저한 안보를 위해 징병제는 불가피하다는 주장 역시 이해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인류 역사는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 고통과 상처의 연속이었으며 아마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를 위한다는 특정한 미명 아래 개인의 권리가 도를 넘어 지나치게 훼손되는 것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걷어내져야 할 그림자라고 믿는다. 


우리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이 군사적 위협의 존재가 아니며, 안보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는 순진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를 위한 견고한 안보 체계와 정신의 중요성은 십분 인정한다. 그렇지만, 권리의 차원에서도 또 현실적인 효율성 측면에서도 현재 유지되고 있는 징병제도는 불합리하다는 것이 결론이다. 인간 사회의 진보는 항상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더 폭넓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것을 위해서는,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거고 또 너를 위한 것이니, 어쩔 수 없어. 네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라고 속삭이는 많은 법과 제도에 과감하게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누군가는 나에게 남들 다 힘들어도 하는 건데 왜 너는 그렇게 불만이 많느냐고 질책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주는 고통이나 불합리함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너보다 힘들게 근무하는 사람들도 있고, 옛날에는 더 심했다고 넌지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같은 사안일지라도 그것으로부터 느끼는 고통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것이며, 더 큰 불합리함과 고통이 다른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해서 오직 '상대적으로' 작은 나의 고통이 쉽게 뭉개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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