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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Candy Apr 01. 2022

남 좀 따라하면 어때

글씨 잘쓴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칭찬받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악필은 아닌 듯 합니다. 처음 글씨체에 대해서 생각했던 건 아마 초등학교 6학년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도 글씨 좀 예쁘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짝궁한테 너 글씨 쓰는 것 좀 보여달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짝은 여자애였거든요. 6학년 제 머릿 속에서는 여자애 글씨가 남자애 글씨보다 정갈하고 동글동글 미적으로 탁월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렇게 걔의 글씨를 잘 관찰하다가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나는 ㅅ이나ㅈ을 쓸 때 별 생각 없이 쓰는데, 그 친구는 약간 왼쪽으로 기울여서 쓰더라구요.


그때 여자애들 글씨는 대부분 약간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아! 이거구나. 몇 가지 특징을 더 발견합니다. 일단 이응은 내 생각보다 크게 써줘야 하고, 시옷과 지읒은 왼쪽으로 살짝 기울여 주고, 모음은 자음보다 약간 작게 써주면 귀여운 글씨가 된다는 걸 깨달아 버립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합니다. 그러다가 저랑 꽤 가까웠던 한 남학생 친구가 글씨 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친구는 자음과 모음을 이어서 쓰더군요. 멋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음과 모음을 이어서 쓰니 어른 글씨같고 멋지더군요..


이것도 따라해보기 시작합니다! 자음과 모음을 붙여 쓰는 연습을 조금씩 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악필은 아니게 됩니다. 그 이후로 이상한 습관이 생깁니다. 중학교 때, 독특한 글씨체를 가진 국어 선생님의 글씨체를 저도 모르게 따라 쓰게 됩니다. 완벽히 따라하진 않고,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특징만 몇 개 카피해서 따라하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많이 듣는 인강 강사분들의 글씨체를 카피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강민성 한국사 강사님, 한석원 수학 강사님, 이명학 영어 강사님의 글씨체의 특징들을 골고루 번갈아가며 장착하게 됩니다.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던 시기에는 한석원의 스타일과 비슷하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던 시기에는 이명학의 스타일과 비슷하게 글씨를 쓰고 있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지금의 제 글씨체가 탄생합니다. 남들은 제 글씨를 보고 절대 모르겠지만 제 눈엔 보입니다. 즐거운 비밀이지요. 글씨를 아래로 길게 늘이는 버릇은 어디에서 왔고, 히읗을 한번에 날려 쓰는 버릇은 어디에서 왔는지 저는 다 기억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시학』에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라고 말합니다. 2300년 전 사람이 창조를 위해서 모방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니, 그 이후 새로운 것들이 마구 더 생겨난 현대 사회에서 모방이 아닌 것이 있을까요. 오롯이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또 피카소는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라고 말했다고도 합니다.


저는 무엇이든 훔치고 싶은 대로 훔치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성공한 사람, 혹은 내가 본받고 싶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보석을 훔친다면 벌을 받겠지만 그들의 말투, 글씨체, 옷차림, 생활습관, 사고방식은 마음껏 도둑질해도 상관없으니까요. 또 다양한 것들을 모방하고 합치는 과정에서 나만의 개성이 한 방울 톡 묻어나기도 합니다. 그게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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