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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Oct 25. 2022

인간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지마 블루 - 러브, 데스 + 로봇 시즌1(2019)

√ 스포일러가 엄청납니다. 원치 않는 분은 읽지 않으시길 추천합니다.


☞ 러브, 데스 + 로봇(Love, Death + Robot) 시즌1 중에서
지마 블루(Zima Blue)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애니메이션 / 18부작 옴니버스
☞ 2019.03.15. 넷플릭스 방영 / 절대 성인용
☞ 작품 관련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클레어는 최고의 예술가 ‘지마 블루’의 인터뷰를 위해 가고 있다.

줄거리 내용은 인터뷰를 통해 밝히는 지마 블루의 예술관과 그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 지마 블루는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자신의 예술적 한계에 대한 도전을 시작한다.

그가 도전한 것은 우주였다. 도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스케일 또한 전 우주적으로 커진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는 육체 개조를 통해 감각을 업그레이드하고, 산소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며, 우주에서도 견딜 수 있는 육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마 블루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가 클레어를 인터뷰 초청한 이유는 그의 마지막 작품에 대하여 설명하고, 자신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지마 블루의 마지막 작품과 연관된 그의 비밀은 무엇일까?




‘예술’, 그중에서도 그림을 매개로 하는 작품이라 그런지 작화가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굵고 강렬한 선과 고딕을 바탕으로 한 각진 디자인은 어둡고 암울한 느낌을 주는 색채와 어울려 작품의 기본적인 메시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인체의 비율이나 선이 다분히 무시된 그림체는 다른 작품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대답하기 어려운 철학적 질문으로 시작해서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더 어렵고 복잡한 질문으로 끝이 난다.


이 질문은 아무리 위대하다는 평을 듣는 예술가도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딱 들어맞는 정답은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예술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기법’ 정도로 얘기하는 것은 너무 예술의 기술적 표현에 치중된 정의인 것 같고, 인간의 정신세계라 함은 거의 무한한 상상력을 가질 수 있기에 ‘정의’라는 틀 안에 두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처럼 느껴진다.


대문호로 칭송되는 톨스토이의 저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주장한 바를 인용하면, ‘예술가가 느낀 어떤 것을 그만의 부호로 표현하고 그것을 본 관객이 그 감정에 동화되어 같은 것을 느끼면 그것이 예술’이라고 했다.


말이 참 어렵다.

지금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본인이 한참 부족한 사람이므로 반론 같은 것은 꺼내 들지도 못할 처지이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생각을 좀 적어보자면 이렇다.


일단 ‘예술가가’로 시작하는 주어부터가 모호하다는 생각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주체를 ‘예술가’로 시작하면 ‘예술’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을 행하는 주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즉 주어로 자리 잡았지만 주체를 알 수 없는 주어인 셈이다. 또 ‘느낀 어떤 것’도 너무 추상적이다. 물론 광범위한 개념을 표현하느라 선택한 말이겠지만, 이 말을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모호한 주체인 ‘예술가가 느낀 것만’을 ‘예술가만의 부호로?’, 아마도 문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예술가가 무슨 특권층도 아니고... 거부감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걸까? 그 뒤에 따라오는 ‘그것을 본 관객’은 ‘예술가가 느낀 어떤 것’과 ‘예술가만의 부호’를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 한마디로 두리뭉실하고 말에 대한 책임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라는 개인적 생각이다.


그래서 다시 좀 쉽게 정리해서 읽자면, “저작자가 느낀 바를 표현해 그것을 이해한 사람이 동감하는 것이 예술”이라 정리해 보았다.


그래도 의문부호가 마구 찍힌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채 자신만 가끔 들여다본다면, 이것은 ‘예술 활동’이 아닌 것인가? 또는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관념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했는데, 정작 동감을 표현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것은 예술인가 아닌가?

아! 머리 아프다.


다시 작품 <지마 블루>로 돌아가 보자.


이번에는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놓여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별 도움도 안 되는 개인적인 사족을 다는 것보다는 작품 <지마 블루>에서 제시한 것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마는 자신을 상징하는 색깔로 블루를 선택했다. 주로 우주의 광활하고 아름다움을 그리던 그가 언젠가부터 자신의 작품에 블루를 넣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던 크기의 블루는 점점 커지더니 결국 블루로 가득 찬 작품을 내놓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이후 작품 활동은 우주의 운석에 이르기까지 모두 블루로 칠하면서 색깔 블루에 집착한다.


알려져 있기로는 지마가 불멸의 존재나 다름없는 우주(코스모스)를 예술로 표현하려 하면서, 자신도 불사의 몸이 필요했기 때문에 불법 사이버 개조를 하는 행성을 찾아가 생물학적 수술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극한의 환경을 견딜 수 있는 피부, 알려진 모든 스펙트럼을 볼 수 있는 시력과 더 이상 산소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등. 그렇게 강화된 육체로 우주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지마가 클레어를 데리고 도착한 곳에서 말한다.


“진실을 탐구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죠”


도착한 곳에서는 수영장 공사를 진행되고 있었다.


“예술을 통해 탐구하던 걸 이해했습니다”


여기에서 지마의 비밀과 연결된다.


지마는 사실 수영장 벽 청소를 하는 작은 로봇이었다. 지마의 단순한 기능에 만족하지 못한 주인에 의해 첫 개조가 시행된다. 처음으로 얻은 것은 색각과 그것을 색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두뇌였다.

이후 계속된 개조와 업그레이드를 통해 지금의 지마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영장은 지마에게 어머니와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그토록 집착했던 블루 또한 수영장 타일의 색깔이었던 것이다.


이후에 보여준 지마의 마지막 작품인 수영장 퍼포먼스는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지마가 예술을 통해 이해한 것은 (Home)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생겨나 처음 봤던 색깔과 첫 장소로의 귀환, 그리고 변형되었던 모든 것을 해체하고 처음의 상태로 돌아간다. 가장 단순했던, 가장 순수했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지마에게 있어서 예술이 추구하는 바는 순수했던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수영장은 그 회고를 간직한 ‘집’이었다.


우주를 아우른 그의 여정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거장의 휘황찬란한 수식어로 설명된 말보다 더 가슴에 와닿는 것은 왜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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