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회귀 – 생활·문화편
이런 과정에서 부모와 자식은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게다가 표준이나 정석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선례라는 것도 없고(그런 획일화가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사회의 구조적 현상마저 혼란하다면 혼란 이상의 현상이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더욱 큰 문제는 금방 익숙해져 간다는 데 있다. 개인이 익숙함에 빠져드는 것보다 그것들이 모여 사회적 익숙함으로 진화해 여론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나이가 스물이 넘고 서른이 넘어도 경제적 자립이 힘든 현실, 연애는 하고 싶은데 결혼은 생각지도 못할 현실, 출발선 자체가 다른 것도 힘든데 각종 특혜와 반칙이 넘쳐나는 현실이 젊은이들에게는 어떻게 다가올까?
그런 억울함, 서글픔, 두려움을 누구와 얘기 나눠야 하나? 오직 경쟁과 성공만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누가 그런 문제를 밖으로 꺼내놓으며 자연스럽게 화두로 던져낼 수 있을까?
거기에다 사회는 온통 혼란, 대립, 분열, 오류로 넘쳐난다면…
결국 반사회적 감정이 된다. 또는 자괴감 이상의 어떤 감정으로 남아 자신 내면을 파고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포자기를 넘어 비관에 빠지고 자신 스스로 목 조르는 방법 외에 어떤 선택지가 남아있겠는가?
희망 없는 내일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오늘에 어떤 의미를 둘 수 있을까?
‘될 대로 돼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같은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을 상상해보라. 젊은 층에서 자살률이 올라가는 것, 마약 복용률이 늘어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OECD 통계 수치가 무슨 가요 프로그램 순위도 아닌데 ‘우와~’ 또는 ‘하~’하며 놀라움과 탄식만 해댄다. 그러나 그다음 날도 오늘과 다르지 않다.
이런 걱정과 의식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걱정하면서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라는 얘기를 시작한 것은 대충 어림잡아도 10년은 훌쩍 지났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지금까지 변화된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젊은이와 노인, 여성과 남성, 부자와 가난한 자, 보수와 진보 등 편 가르고 잘잘하게 흩어지기 바쁘다.
참 이상하다. 통합을 이야기할수록 흩어지고, 공정을 이야기할수록 세상은 불공정하다는 느낌이다. 잘잘하게 나누고 나누다 보면 최종에는 결국 개인밖에 남지 않는다. 개인만 남았을 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온통 이기적인 것 외에 무엇이 앞설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지금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
한 개인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본능적인 이기심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구조와 인공적으로 형성되는 현상에 의해 조정된 감정과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기적 편견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고 일본이 호시탐탐 야욕을 가동하는 데서 남북 평화통일이 멀어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북한 사회는 차치하고라도 당장 남한만 따져 살펴봐도 사회 퇴보적 난맥이 통합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같은 민족끼리도 잘잘하게 나뉘고 찢어질 대로 찢어져 분열하는 마당에 무슨 민족통일을 꿈꿀 수 있나? 아니 통일이 된다고 해도 문제다. 이런 이기적 생각으로 가득한 사회에서 우리보다 못 사는 북한 사회를 민주적 절차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냔 말이다. 통일은 꿈도 꾸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우리 사회만이라도 분열하고 나뉘는 현상을 더 이상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우리의 통합을 가로막고 있는지, 무엇이 우리를 분열하게 만드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선순환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존중을 밑바탕으로 한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형평성이 전제된 공정이 실현되어야 한다.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사회가 실현되어야 한다. 어떤 한 사람의 독선이나 욕심이 선동되고 현실화되어서는 안 되며 절대 허용되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런 거짓은 유지비용으로 많은 피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아야 한다.
세상에 이러한 이해타산이나 욕심, 이기심 등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인 헌신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행하는 사랑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바탕으로 심층적 고민을 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편적인 마음가짐으로 확대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살펴봐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친근하지 않은 타인에게 이 수준의 관계를 요구하는 것 자체는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거리에 오가며 만나는 이웃들 중에 나보다 어른은 나의 부모요, 나보다 어린 사람은 나의 자식이라고 생각해보면 그 하나하나의 생명 중에 귀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뿌리를 쫓아 올라가다 보면 결국 모두가 한 가족, 한 뿌리인데 가능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상호 존중’이 아니라 ‘상호 이해’다.
‘존중’은 마음대로근이 아니라 일종의 제대로근인 내괄약근이라고 할 수 있다. ‘존중’이나 ‘존경’은 “나 좀 존중해줘”, “야! 너 나 존경 안 해?” 한다고 해서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존중이나 존경심이 생겨나거나 아니라면 그 반대의 감정이 생겨나거나 할 것이다.
이 말을 현실에 적용해 말하자면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서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마음 쓰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자신을 우선시하고 합리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빨리빨리병’의 일환이기도 하겠지만 요즘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에게 생겨난 이미지로 판단해버리고 상대방의 말을 끊고 들어가 자기주장만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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