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회귀 – 생활·문화편
남과 남이 만나 사랑이 싹트고, 연애하고 결혼하여 부부가 된다.
‘남’이라는 입장에서 흠결처럼 보이는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서로 존중하며 사랑을 이룬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처음 사랑이 생겨났을 때 사랑은 사람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하다. 어떤 종교나 이념, 가치관보다, 아니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된다. 목숨이라도 쉽게 내어줄 수 있는, 그보다 더한 것이라 해도 얼마든지 희생해도 좋을 그 무언가가 바로 ‘사랑’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질 수 있는 가장 크고 고귀하며 소중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남녀 간에 사랑뿐 아니라 부모 자식 간에 사랑, 친구 사이에 우정,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선한 유대적 감정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은 사람의 삶을 통틀어 그렇게 광범위하게 걸쳐 있으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삶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다못해 오직 자신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말하는 성경에서조차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통 이렇게 사랑으로 맺어져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
사랑은 결코 억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감정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질투도 되고, 집착이 되기도 하며 공포로 변하기까지도 한다.
물론 역대 많은 예술에서 표현하려고 애쓰는 만큼 많은 감정과 관계, 변화 등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찌 그 다양성을 글자 몇으로 갈음할 수 있으리. 그래서 범위를 확 좁혀 부모 자식 사이에 일어나는, 그중에서도 작은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뉴스를 접하다 보면 정말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로 인해서 순수성이 훼손된 면도 없지 않으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아무런 보상이나 원하는 것 없이, 애초에 그런 발상 자체가 없이 태어난 새 생명을 보며 기쁨과 행복에 빠져 사랑의 에너지를 한없이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것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아무리 힘들고 피곤하고 지쳐도 배고프면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깨끗하게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아이가 아프면 잠 한숨 안 자고 옆에 붙어 앉아 아픈 아이보다 더욱 가슴 아파하는 부모님. 행여나 잘못된 길로 빠지지는 않을까, 행여 나쁜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다치지는 않을까… 자신의 삶에서 자신보다 더 우선순위에 놓이는 자식.
그러나 시간은 잔혹하다. 모든 아이들은 자라나고 성인이 되며 언젠가는 부모 곁을 떠나 독립적인 자신만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식의 독립된 자아를 얼마나 빨리 인정하고 품에서 떠나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모든 부모의 딜레마가 되고, 이는 곧 독립된 한 사람으로, 사회 구성원으로, 완전히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직결된다.
하지만 혼란스럽다. 이제껏 부모에게 의지하고 의존했던 생활에서 독립적인 주체로 나선다는 것이 부모에게도, 자신에게도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때로는 이 혼란이 대립이나 반항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처음에는 “엄만 그것도 몰라?”와 같은 말로 시작해서 “내 삶은 내가 알아서 해, 참견하지 마”, “엄마가 뭘 안다고 그래?”, “아빠랑은 말이 안 통해”, “제발 내 인생에서 빠져줘” 같은 대사가 줄줄 나온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내뱉는 말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헛살았구나’로 시작해서 ‘그럼 나는 도대체 너에게 뭐냐?’, ‘이러려고 열 달을 배 아파서 낳았나…’ 등 독립은커녕 감정적 붕괴를 추스르기도 힘겨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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