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정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는가?

왜요? 8

by 마지막 네오

8.

근래 ‘법과 원칙’ 못지않게 훼손되고 변질한 말이 바로 ‘자유’다.

자유란 얽매임이 없는 사고, 그 생각을 펴는 것, 그 신념에 맞게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다.

타인과 사회에 피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율 이상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고 얽매임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별것 아닌 무지렁이 글쟁이의 호소보다는 인생을 통해 몸소 경험한 선인들의 말을 빌려 풀어내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자유를 향한 쉬운 걸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평생을 인권운동에 헌신했던 ‘넬슨 만델라’의 말에는 진정한 자유를 얻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단단한 보호막을 허물어야 하는 일이고, 나 혼자가 아니라 다수의 대중이 깨닫고 눈을 떠야만 가능한 일이며, 지난한 싸움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자유는 특권층이나 권력자가 대중에게 생색내며 툭 던져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통령이 연설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불러 외친다고 그 나라 국민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자유를 가로막는 것은 항상 위선적인 속내를 숨기고 듣기 좋은 말로 현혹하는 짓을 일삼는 권력과 폭력이었다.


“일시적인 안전을 얻기 위해 본질적인 자유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자유도 안전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의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자신의 현재 안위에 만족하며 침묵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질타하는 말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렵게 얻어낸 자유에 언제라도 숟가락만 들고 와 얹어놓는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이 팽배한 요즘, 어느 순간에 자신에게도 어려움이 들이닥치게 되면 누구에게 손을 벌릴 수 있을까? 뻔뻔한 행동이야 그렇다고 쳐도 누가 그에게 협력의 손길을 내밀까?

진영이니 대세니 하는 말로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받는 요즘,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평생 포로가 되는 것보다 낫다.”
- 밥 말리


저항정신과 평등, 인권의 가치를 노래했던 자메이카 출신의 전설적인 아티스트 ‘밥 말리’의 이 말은, 마치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지만 그들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던져 독립운동을 펼쳤던 우리 선조들의 외침처럼 들린다.

탄압과 부당함에 저항하는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자유가 아닐까 한다.


“난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생각으로 하여금 박해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 볼테르


프랑스를 대표하는 계몽주의 작가이자 당대 사회의 부조리와 위선을 비판하며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드높였던 ‘볼테르’의 이 말은, ‘사회’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누리고 지켜야 할 자유의 근본적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TBS나 MBC 등의 언론이 정부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억압당할 때, 같은 언론인으로서 함께 나서 대항했던 언론이 몇이나 있던가?

권력에 의해 행해지는 부당한 폭력이나 불합리한 처분에 침묵하거나 모른 척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언론의 역할이 무엇이던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거나 의미를 잃는다면 불필요한 공해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 권력에 아첨하고 그들의 스피커를 자처한다면, 그것은 이미 언론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따름이다.


자신이 가진 시선이나 의견은 얼마든지 타인과 다를 수 있다. 아니 달라야 한다.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만 내는 것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지령 체제로 이끌려가는 방식이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생각을 자유롭게 펴낼 수 있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적인 사회이며 자유로운 사회이다.


지금까지의 말을 요약하자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거기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군인은 가족과 이웃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교육자는 올바른 교육을 통해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아야 할 의무가 있다.

언론은 오직 진실을 바탕으로 부조리를 고발하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진실에 눈 뜰 수 있도록 투명하게 전달할 의무가 있다.

정치인 역시 좋은 정책을 바르게 펼쳐 나감으로써 국가와 사회 발전의 바탕을 만들고, 누구나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모두 그런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이요, 거기에 따른 법적, 사회적, 윤리적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이나 의무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들이 있다. 자신의 권한만 강조하고 혜택과 이득은 가져가면서, 권위는 누리되 의무는 망각하고 책임은 전혀 지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다.

‘선택적 정의’를 통해 법마저 무시하고, 세상 모든 것 위에 올라앉은 듯 군림하며, 아무런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들은 참 ‘이상하고 편리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책임이 막중한 자리를 꿰차고 앉아 의무는 흉내만 낼뿐, 정작 그들이 몰두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여 영원히 '해먹을 결심'을 하나씩 실행해 가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여기에 '국가'나 '국민' 나아가 '희망'이나 '미래' 따위는 없다. 오직 '더 큰 권력'만 있을 뿐.


‘선택적 정의’라는 말처럼 화려한 오류로 빛나는 말이 있던가! 이런 용어 자체가 우리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공정하지 않은 공정, 편파적인 평등, 강제되는 자유, 책임 없는 권한,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의무, 거짓과 위선으로 위장된 진실, 반성 없는 반성…


언제부터 권력과 시대에 따라 단어의 뜻도 변화한 것인지, 본뜻을 제대로 적용하고 있는 경우를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본질적 자유를 잃었다는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침묵하며 주어지는 대로 산다면 우리는 ‘개·돼지’의 수준을 넘어 그 이하의 존재로 남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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