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포르노 못지않은 약자 포르노
영화의 시작 부분에 뜬금없이 그 시절 할리우드 유명 영화배우들을 언급하거나 <슈퍼맨>, <록키>의 OST가 별 관련성 없이 쓰였다. 문맥상 아무리 생각해 봐도 관련 없는 분량이다.
또 이태원 나이트클럽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신디 로퍼의 <쉬 밥(She Bob)>이나 ‘알랭 들롱’이라는 전설적인 배우 이름의 쓰임새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들으면 소소한 추억일 수 있지만, 당시 영화에선 이런 소품으로 쓰인 것들은 그들의 유명세에 묻어가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일종의 ‘시선 모으기’나 ‘관심 끌기’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행태는 자신의 창작성 부족을 엉뚱한 방식으로 메꿔보려는 파렴치한 행태다.
1980년대를 휩쓸었던 신디 로퍼의 <쉬 밥>의 인기는 어린아이도 흥얼거릴 정도로 높았다. 2000년도가 지나서 가수 왁스가 <오빠>라는 곡으로 번안해 불렀을 때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명곡이다.
이번에 별생각 없이 다시 본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의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다.
인기 있던 상류층 자제가 시대적 흐름에 편승해 억지로 써댄 그의 소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는 게 아닌 부분이 있다.
영화는 후반부부터 갑자기 급격하게 장르를 바꾼다. 시작은 코믹으로 시작해서 어설픈 청춘 멜로를 빙자하다가 갑자기 신파 드라마로 급변한다.
철수와 미미의 친구가 된 보물섬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의학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치병이다.
그런대로 이런 설정까지는 앞부분의 유치함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로 이어지는 영상들이다.
얼마 전에 실질적인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가 외국까지 나가서 ‘빈곤 포르노’라는 몹쓸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 이 영화는 빈곤 포르노 못지않은 ‘약자 포르노’를 시전하고 있다.
결코 그들이 주인공이 아닌 상황에서 억지로 짜 맞춘 영상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영화 엔딩 부분에 나오는 ‘도움을 주신 분들’에 이름을 올린 ‘서울 장애자 종합복지관’, ‘삼육재활원’, ‘명휘원’ 등의 장애인 시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들이 명분을 이해하고 영화에 참여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시설의 책임자 수준에서 합의된 내용을 토대로 진행되었으리라.
어쩌면 사회의 그늘에 있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들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다는 좋은 의도에서 실행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영화의 스토리 문맥상 그들의 모습은 영화 흥행을 위한 하나의 소모품 수준으로 소비되고 있다.
보물섬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음에도 장애 아이들을 찾아가 공부를 가르쳐주고, 봉사활동을 이어가는 의로운 사람이다.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인 것이다.
문제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영화에서 보물섬의 이런 면을 부각하기 위해 현실성 없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영화 어디에 그들의 불편함이나 어려운 점을 대변하는 장면이 있던가!
그저 약자로서 불쌍한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불쌍한 약자를 나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돕는 의로운 착한 사람이다’를 강조하기 위한 콘셉트로 사용된 것이다.
즉 장애 아이들의 진실과 현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물섬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을 부각하기 위한 소품으로 사용된 것이다.
어린 시절 한때, 나도 김혜수, 하희라, 강수연을 포함해 피비 케이츠, 브룩 쉴즈 등 하이틴 스타에 열광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있었던 얄개 시리즈의 이승현이나 강주희 같은 청춘스타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젊음, 청춘은 인생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다. 그렇기에 가장 소중한 때이기도 하다.
시간이 훌쩍 지나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아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 가슴에 깃들어 있는 그 무엇이다. 다시 또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보면 현재의 젊음은 그때의 젊음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펀지 같은 감수성을 가진 순박함이 오염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빛내기 위해 약자를 이용하는 걸 정당화한다면, 냉정한 비판 없이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향한다면, 과연 젊다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 찬란한 아름다움이 점점 누런 이가 되어가는 듯한 변화를 두고 여전히 젊음의 아름다움을 예찬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만들 당시 이규형 감독은 젊었다. 강수연도 박중훈도 김세준도, 모두 한창 아름다운 젊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본 후에 느끼는 것은 누렇다 못해 얼른 코를 잡아야만 할 구린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치환되고 마는 창작물의 가치도 저급하지만, 의도된 저급함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 구린내에 못 견뎌 울렁울렁 토할 것만 같다.
젊음을 빗댄 이유는 이 작품이 청춘을 빙자했기 때문이다.
어느 영화평론가가 주야장천 주장하는 우리 영화의 ‘신파’에 대한 비판이 무색하다.
나는 그 평론가가 주장하는 ‘신파’ 논리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정 유도처럼, 감정에 대한 솔직한 동감마저 어느새 억지로 눈물이나 짜내는 ‘신파’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