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대항하는 또 다른 방법
불필요한 요소를 뺀, 쓸데없는 말싸움을 부를 필요도 없는, 그러나 중립적인 태도는 고려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나의 주관적인 견해를 꺼내 들자면 이렇다.
많은 혹평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 한대로 화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말은, 감독의 의도 중 하나는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끌어내는 것이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 의도대로 전체 관람객 수에 비해서 다양한 의견이 댓글로 달렸다.
영화 <F20>은 르포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스릴러 장르에 맞게 구성된 상업적인 작품이다. 또 ‘조현병’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조현병 환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따라서 ‘조현병 환자는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지 않다.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 사회 일반이 조현병 환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혹평이 많다는 것은, 이 질문에 나름 답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건의 원인과 전개, 결말에 이르기까지 사실 조현병의 역할은 거의 없다. 주인공은 편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해 가는 것이지 조현병 때문에 파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독은 조현병 환자나 환자의 가족 입장에서 영화를 끌어가고 있지도 않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객관적 시점이다. 유사하면 헛갈릴 수 있다.
카메라는 애란의 가족을 비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은 애란의 내면을 비추고 있다. 그 불안정한 내면의 심리는 애란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편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초점이 흐려진 이유는 ‘조현병’, 즉 ‘정신병’과 같은 말로 치환될 수 있는 자극적이면서도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병을 다루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범거부적인 소재가 포용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적인 시대 흐름과 맞물리면서 판단의 혼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강한 부정은 때론 긍정일 수 있다. ‘조현병’이라는 강한 이미지 때문에 강조하고자 했던 진짜 핵심이 밀려나 버린 꼴이 됐다.
오해든 잘못된 이해든 간에 조현병 환자의 가족이라면 악평을 댓글로 달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가 곡해되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든 경험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에서 표현된 조현병 증세는 병의 위험도나 무서움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감독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그 병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즉 ‘사회적 편견’이라는 말이다.
영화는 그 편견의 입장에서도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지 않다.
편견 때문에 조현병 환자의 가족, 이 영화의 경우에는 ‘애란’이라는 인물이 파멸해 간다. 다시 말하면 조현병은 하나의 소품처럼 자리할 뿐, 비판이 가해져야 할 주체는 바로 ‘편견’인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악플은 이 영화가 조현병 환자에 대한 편견을 심화시킨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정작 영화는 조현병 환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을 비판하기 위해 제단 위에 올려놓고 있다.
현실의 사실(진실)은 불편한 것이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불편함만 남았다는 어떤 분의 글을 보면서, 무엇이 그렇게 불편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영화에서 조현병 환자를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상품화했던가?
영화의 어떤 메시지가 불편했을까?
비현실적인 얘기를 현실처럼 연출했던가? 아니면 현실을 무시하고 비현실적인 얘기로 가득했던가?
책이 그러하듯 영화도 천만 관객 영화가 있고, 개봉했는지 모르고 지나치는 영화도 있다. 더 다수의 사람이 관람했다고 해서 꼭 좋은 영화는 아니다. 서점의 가판대 앞자리에 ‘베스트셀러’라는 제목을 달고 올려졌다고 반드시 좋은 책이 아니듯이.
저급한 미국식 화장실 코미디가 난무하는 영화라 해도, 관람 후에 뭔가 생각하고 판단할 가치가 있다면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도 그렇고 책도 그렇다.
이렇듯 작품에 대한 가치 판단은 스토리를 만든 화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있다. 그럼 면에서 영화 <F20>은 비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기에는 안타까운 영화다. 왜냐하면 충분히 논쟁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