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차이의 정당성?
누군가를 ‘비난’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부터 비난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비판’ 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에 대하여 충분히 알아야만 한다.
‘안다’는 건 참 어렵다. 학문을 통한 지식만으로, 삶을 통한 경험만으로, 골똘히 생각해서 얻은 자각만으로는 ‘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과 경험 그리고 자각의 비율이 어느 하나라도 넘쳐나면, 그 순간 ‘아는 것’이 아니라 ‘편견’이 되고 만다. ‘편견’은 아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저 허울 좋은 자기 방어기제의 하나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입장’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에 따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타인에게는 옳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선(善)’이라 생각한 것이 상대에게는 ‘악(惡)’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런 입장의 차이가 미시적으로는 개인과 개인 간 갈등을 만들고, 거시적으로는 전 인류를 위협하는 거대한 힘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중요하다.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라는 것은 상대의 이익을 살피라는 뜻이 아니다. 상대를 ‘존중’하라는 의미다.
세상에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평화와 화합을 바란다. 설령 독재자라 할지라도 그가 꿈꾸는 평화와 화합은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모두가 원하는 바를 만족하며 공생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도 모른다기보다는 ‘인간’의 밑바탕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현실화할 수 없는 유토피아 같은 것이다.
내가 남의 처지를 이해하려면 나의 처지를 먼저 알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면 남의 처지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자기 보호를 우선적인 본능으로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영화 <F20>은 사람들이 조현증 환자에 대한 편견을 표출하는 원인으로 고양이가 잔인하게 난도질당한 사건을 예로 든다. 끔찍한 사건을 맞닥뜨린 사람들은 어떤 근거도 없이 조현증 환자가 저지른 짓이라고 판단한다.
공포에 질린 것은 사람들이다. 본능대로 자기 보호를 빌미로 추측하고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모인다. 개인 단위로 볼 때는 자기 보호의 차원(피해자)이었지만, 다수가 모였을 때 근거 없는 추측은 거대한 폭력(가해자)으로 나타난다.
또한 개인의 각성(반성)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대중의 반성은 여론이라는 덩어리가 되므로 바꾸기 어렵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불편한 진실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쉽고 편한 추측에 의지했다.
권력은 쉽고 편안한 안락함을 먹고 산다. 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인간은 그런 진실을 깨닫는다고 해도 이미 자신이 발 담근 오류를 부정하기 싫어서 외면하는 경우마저 있는 난해한 동물이다.
개인이 되었든 대중이 되었든 간에 핵심은 바로 ‘입장’ 차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 나 혼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개인적인 처지를 정당화하는 말이다. 동시에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아닌 타인이 필요하다는 말도 될 수 있다.
맹수 앞에 두 사람이 던져졌다고 가정해 보자. ‘나와 너’는 누가 먼저 맹수에게 당하길 바랄까?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위한 가장 근본인 이 ‘입장’의 이중성 때문에 편견은 사라질 수 없다. 하지만 얘기를 이렇게 바꿔보자.
맹수 앞에 두 사람이 던져졌다. ‘엄마와 아들’은 누가 먼저 맹수에게 당하길 바랄까? 이전 예와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생각할 것이다.
왜, 무엇이 다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해답이 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뭐야? 뭔가 다를 줄 알았더니, 너무 당연한 소리만 지껄이고 있네.”라고.
영화 <F20>은 감독의 또 다른 바람과는 달리 흥행에 실패했다. 의도는 있었되, 대중의 불편한 거부감은 생각지 못한 탓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중적 견해에 휩쓸리기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스스로 깨치는 눈도 필요하다는 점은 말하고 싶다.
진부하게 “모두가 ‘아니요’라고 말할 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스스로 깨치는 것이지, 그런 소리 백 번 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는 사람은 맛있다고 하며 계속 똥을 찍어 먹을 테니.
“뭐, 맛있으면 되는 거지”라며 헛웃음 짓고 말면 된다.
뭔가 명료한 결론을 기대하신 분들은 실망스러울 것이다. 명료한 결론 같은 것은 없다.
사람이 로봇과 다른 점은 프로그래밍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고 어떤 ‘처지’와 ‘입장’이냐에 따라 하늘에 걸린 별을 쫓듯 뛰어다닌다면, 결국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에도 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이 예쁜 작은 빛이 아니라 영겁의 시간 이전에 사라진 항성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