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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Feb 16. 2023

스위치(2023) #5/6

따라 하기에도 기술은 필요하다

☞ 스포일러는 그저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걱정되시는 분은 읽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이브미디어코프 [출처 : https://movie.daum.net]


이어지는 장면은 더 가관이다.

수현이 묻는다.

“그래서 부자였을 때가 좋아 지금이 좋아?”

박강은 대답한다.

“당연히 지금이 더 좋지.”

라고.

그러면서 수현과 아이들의 존재를 그 이유로 답한다.


아마 연세 좀 지긋하신 분들이 이 장면을 봤더라면, “에구… 세상 물정 모르는 것들, 그래, 한번 살아봐라. 그게 얼마나 가는지…” 하시며 쓴웃음을 지으셨을 것이다.

아직 젊은 시절을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애환’이 되는 과정을 이해하라고 할 순 없다. 십 대는 풋풋한 십 대다워야 하고, 어른은 어른다우면 되는 것이다.


영화 <스위치>가 영화 <패밀리 맨>의 표절이든 패러디든 뭐든 간에, 그에 앞서 이야기를 빌려오더라도 더 세심하게 한국적인 정서와 현실에 맞는 상황으로 그려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이런 형식의 영화들은 이전 글 <패밀리 맨>에서도 언급했듯이 법칙처럼 작용하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어떤 영화 전문가의 글을 참고해서 증명하자면,

"영화 <패밀리 맨>도 1843년에 찰스 디킨스가 발표한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또한 1990년에 발표된 제임스 올 감독의 <운명의 칵테일(Mr. Destiny)>을 원형으로 재각색한 작품이라고 한다." 제임스 벨루시와 린다 해밀턴, 마이클 케인 등이 출연한 작품이다.

(참고 및 출처 : 최원균 무비가이더, 「주간경향」, 2023년 1월호 1511호, p.69)


결국 <패밀리 맨>도 <스위치>도 재각색의 과정에서 각본가와 감독에 의해서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 설정과 현실에 맞게 각색되느냐에 따라 작품성이 정해진다는 얘기다.


한 작품은 크리스마스 영화의 대표적인 명작으로 남았고, 한 작품은 극장에 걸리자마자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표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원성을 듣는 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단순히 <패밀리 맨>이 먼저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존의 스토리 중에 공식적으로 무조건 ‘통하는’ 이야기를 가져와 특별한 독창성 없이 그대로 재현했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유사하다’ 거나 ‘비슷하다’ 수준에서 벗어나 ‘표절’이라는 격한 반응을 쏟아내는 데 대해 옹호의 말을 해줄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숨겨진 메시지와 주제에 대한 의미가 재각색의 단계를 거치면서, 앞서 지적해 왔듯이 오히려 훼손된 양상도 있다고 본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의 공허함을 돌보기에는 현실의 우리들은 배부른 사람들의 ‘지랄’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그 ‘지랄’이 아예 사회적인 윤리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대놓고 폭주하는 형태라면, 또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영화적 가치는 있을 수 있다.


이런 생각에 미치면서 영화의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니 허탈하기까지 하다. 별 이유 없이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뿐 아니라 그 기회가 현실로 이어지다니! 이건 로또나 금수저 수준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왜 박강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선물로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코믹영화의 해피엔딩에 왜 이토록 허탈하고 화마저 나는 걸까?


©㈜하이브미디어코프 [출처 : https://movie.daum.net]


시끄러운 ‘표절’ 논쟁에 참여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 이 영화가 크리스마스와 가족의 의미를 헛된 꿈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 또한 시대적인 느낌일 수 있겠지만, 현시점에 개봉된 영화이니 현시점에 서서 비평할 뿐이다.


화목한 가족, 그리고 행복…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상품으로, 일반 서민의 삶에서는 꿈으로만 가능한 환상이 되고 말았다.


그 옛날 노예 시대의 흑인 노예들이 현대 흑인들의 생활을 꿈으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과 같이, 비현실적인 요소들로 인해 현실에서 점차 멀어져 우주 공간으로 멀리 날아가 버린 <요술공주 밍키>의 꿈나라처럼 되고 만 것이다.


영화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현실과의 괴리감에서 느껴지는 허탈함 때문이다. 영화가 잘못된 게 아니라 현실의 사회가 잘못된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영해 담아낸다면 영화 장르에서 ‘코미디’라는 장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사회 현실은 개그나 코미디로 웃어넘길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쁜 우리네 서민들의 현실은 사랑이나 낭만 따위에 젖어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볼 틈이 없다. 피곤해서 코 골며 곯아떨어지는 데 남편이든 아내든 상관없다. 생산적인 차원에서 휴식이 우선이다.

아이들은 바쁜 부모의 기계적인 관심 하에 게임이나 다른 세계에 빠져든다. 거기에 익숙해지면 가족에 대한 관념은 이 영화에서 다룬 ‘꿈이나 환상’보다도 더 멀고 먼 안드로메다 밖으로 밀려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조금 크면 엄마, 아빠는 투명 인간이 된다. 필요와 의존에서 벗어나면 불필요한 껍데기를 벗어 버리듯이, 거추장스러운 부속물이 된다.

심지어 부모를 창피해하는 아이들도 많다. 돈과 명예에 따라서 “야!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 하고 큰소리치며 갖가지 사고를 쳐도 유유히 빠져나가는 최악의 인간도 있지만, 그런 정신 나간 종자를 제외하고도 부모를 창피해하는 아이들은 많다.


특히 가난한 부모는 자식에게 창피한 존재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한다든지, 아파트 계단 청소를 한다는지, 새벽에 쓰레기를 수거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아무 일도 없이 허허롭게 방구석만 지키고 있다든지.

요즘 학교에서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라고 묻지 않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니…


그래서 모두가 가난하지 않기 위해,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배운다. 공부의 목적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와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투자하고 공부하며 살아간다.

스님은 아니지만, 저절로 “불쌍한 중생들…” 하며 혀를 찬다.


(#6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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