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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Feb 16. 2023

스위치(2023) #6/6

가족이 트라우마가 되지 않기를…

☞ 스포일러는 그저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걱정되시는 분은 읽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이브미디어코프 [출처 : https://movie.daum.net]


삶의 의미가 목적이 아닌, 삶의 수단이 목적이 된 세상이다.

가족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이기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지낸다. 고전적인 의미로서의 가족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흐름은 더 빠르고 더 건조해질 것이다. 인정할 것은 빨리 인정하자. 현실은 비정하고 냉혹하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사랑 없이, 그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남은 가족. 애써 가족의 의미를 가슴 저 깊은 어딘가를 뒤적거려 애처롭게 찾아 헤매야 하는 현실이다. 당연했던 의미가 어느새 영화 속에서나 맛볼 수 있는 감동적이고 특별한 것이 되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설사 그가 바닥부터 시작해 꼭대기에 이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단계 이상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사람은 이기적이고 단순하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서 생각과 행동이 바뀌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를 이해하기 어렵고, 자녀는 부모를 이해하기 어렵다.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강조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온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다른 이름으로 변해간다.

거기에 예전과는 달리 각종 대중매체와 인터넷 등 자유로운 정보의 범람과 새로운 기술, 새로운 이데올로기,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사회. 점점 세분화되는 세대, 성별, 직업 등등… 복잡·다양해지는 세상 안에서 가족의 의미는 더욱 어려워진다.


물론 게 중에는 처음부터 가족의 의미 따위를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오직 사회적 차원에서 타인의 시선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꾸미고 연출된 삶을 산다.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가련한 아이를 안고 사진 찍는 따위의 행위를 하는 사람,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보란 듯이 그 행위를 되풀이하는 사람, 꼭대기에 올라앉아 떨어질 날은 없다고 믿는 사람, 그러면서 개돼지들은 자기 발밑에서 알아서 길 거라 말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도 영화 <패밀리 맨>이나 <스위치>의 주인공들처럼 크리스마스 기적의 선물로 갱생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옳을까?


사람들은 ‘빈곤 포르노’라는 자극적인 표제에는 관심을 쏟아도, 더 깊이 들어가 ‘인간’ 자체 또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수고는 그리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다. 가스라이팅 수준의 여론몰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반복되는 황당함도 익숙해지면 하나의 현상이 되듯이,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져서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가족’은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연대와 사랑이 중요하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때론 노력할수록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스위치>나 <패밀리 맨>이 가족과 행복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서 조명한 화사한 부분을 통해서 그 반대편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하이브미디어코프 [출처 : https://movie.daum.net]


이런 상상도 해볼 수 있다. 만일 <스위치>의 박강이나 <패밀리 맨>의 잭이 주어진 시간 동안 내내 불평과 비관만 했다면 어땠을까?


개인적으로 사실 두 영화 모두에서 동의가 쉽지 않은 부분이 이것이다.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낯선 나, 그리고 낯선 주변과 낯선 가족.

이것은 처음에는 모두 낯선 타인이자 나를 얽매는 요소이지 나를 깨우치도록 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당연히 불편하고 힘들고 어려운 부분에 대해 불만스러운 게 당연한 순리다. 또한 되돌아간 삶을 행복한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쉽다면, 과오를 깨닫기 위해 되돌아가서 다시 산다는 자체가 모순이 된다. 쉬운 그것을 왜 이전에는 못 했느냐는 질문에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으로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주먹 쥐고 불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면 ‘한참 동안 혼란과 비관에 휩싸여 고생할 것인가?’하고 묻는다면, 난 후자에 표를 던지겠다.


그 삶이 옳든 아니든, 이제껏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부정해야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비롯되는 트라우마는 고작 몇 년이라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회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파생되는 주변 사람들(가족)은 또 어떨까? 고스란히 영향을 줄 것이고 언젠가는 다시 피드백되어 돌아온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니까.


거기에 아내와 딸, 아들이 포함되어 감정이 동하더라도, 이 삶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늘 존재할 테고, 잃어버린 또 다른 삶에 대한 기억은 생각보다 큰 역할을 할 것이므로, 그것은 선물이라기보다 혹은 기적이라기보다는 혹독한 벌이나 저주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나도 색깔에 젖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 여기에서 색깔은 무슨 빨갱이나 좌익, 이런 걸 말하는 것은 아니다. 틀 없는 생각의 자유로움을 꿈꾸는 사람이 스스로 틀을 느낄 때, 그 틀 가득 어떤 한 가지 색깔의 물감이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을 표현한 말이다.


밝은 부분을 더욱 밝혀 가슴에 훈훈함을 남기는 방법도 좋고, 정반대의 어두운 부분을 강조하여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방법도 좋다. 다만 방법에 상관없이 우리가 바라고 향하는 목표는 일치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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