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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Sep 02. 2023

그해 우리는 #3/6

내면에 숨겨진 빌런 극복하기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은 읽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03. 내면에 숨겨진 빌런 극복하기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건축과 그림, 예술과 사람의 접점에서 진솔한 공통점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혼자인 각 개체로서는 지극히 외로운 사람임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고, 기억이 될 수 있고, 심지어 모르던 사이에서 만남과 교감을 통해 새로운 애정의 감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조연인 김지웅과 엔제이, 이솔이, 구은호의 존재가 빛을 발한다.


사람은 어떤 한 가지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존재이다. 즉 농담 던지듯이 하는 말처럼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이면 사랑, 우정이면 우정, 아니면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비롯한 그 무엇이라도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으며, 특히 자신의 빈 곳을 메꿀 수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물론 현재의 우리 세계는 자본주의적 경제 가치관에 휩쓸려 모든 것이 주로 돈에 의해 좌우되지만, 사람에 대한 진리는 돈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최웅도 알고 보면 그다지 행복한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최웅 스스로가 의심하고 바라보는 가족은 그가 그 의미를 깨우치는 순간까지는 결코 정당성이 없었다. 결과적인 형태가 어쨌든 가족은 따뜻한 테두리이면서 동시에 독립적인 존재를 억누르는 커다란 바위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연수나 김지웅이 가진 핵심적 문제의 근원도 가족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가족 간에 연결된 감정과 책임감… 그런 종류였다. 문제는 사람의 성장이란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회적인 관계를 거듭하면서 느끼고 배우는 안에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개인적인 욕구와 공동체적인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한다. 가족을 이루는 것은 정해진 수순에 의해서 저절로 모습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한 독립적인 자아가 성장하면서 새롭게 구축해야 할 공동체적 관념이며, 서로 이타적인 부분만 강조되어서도 안 되고, 독선적인 부분만 강조되어서도 안 되는 특별한 이해관계라는 의미다.


먼저 국연수는 부모가 없다. 그녀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따라서 국연수는 자신이 할머니를 책임져야 한다고, 충실한 가장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를 위하는 마음 때문에 국연수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필사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런 문제는 모두 뒤로 미루어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밀려난 대표적인 감정적 판단의 결과가 바로 최웅과의 이별이었다.


김지웅 역시 불행한 어린 시절은 그렇다 치고 그 연장선에서 아들의 삶에서 멀리 떨어진 객과 같은 엄마가 하나 있을 뿐이다. 극 중에는 그 이유에 대해 선명하게 설명되는 부분이 없다. 모자 사이는 냉랭하다 못해 약간의 증오가 간격을 메우고 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 결핍은 김지웅을 딱 그 자리에서 성장을 멈춰버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린다. 그래서 김지웅은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연약하고 외로워 보인다.


이런 설정은 드라마 후반부에 나타나듯이, 매우 반어법적인 요소가 있다. 마치 세상에서 영웅이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음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빌런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런 빌런의 존재는 물리적인 존재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두려운 건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 마음속의 무엇이라는 얘기다.


물론 최웅은 현재 부모님이 친부모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숙고와 많은 고민에 휩싸인다. 심지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한 내면은 꿈으로까지 나타나 끝없이 최웅을 괴롭힌다.


현실보다 힘든 것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지 못하는 고충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 그리고 그 이후에 성장하면서 그가 심리적으로 겪는 부분이 그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음은 명백하다.


전교 꼴찌를 선택한 이유나 빈둥대듯 살면서 스스로 허우대 멀쩡한 바보처럼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은 최웅 본인이 선택한 나름대로 도피인 셈이다. 그가 선택한 도피처가 바로 그림이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없다. 감정을 가진 존재보다 미세한 점과 선으로만 그려진 세계에 몰입한다.


감정이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기에 비슷한 감정선을 가진 사람은 그 외로움과 쓸쓸함에 단박에 이끌린다. 그래서 엔제이가 최웅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동질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처절하게 외로운 ‘버려진 아이’를 숨겨야만 하는 이와 외형은 인기 톱스타지만 엔제이 개인이 대중에게 느끼는 배려 없는 이중적인 외면은 언뜻 지독한 외로움이라는 ‘상처’ 측면에서 닮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려졌던 아이의 현실과 가난했던 아이의 현실 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망가진 가족 체계 안에서 자란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은 사뭇 커다란 격차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감성적·현실적인 모든 차이를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 드라마를 볼 필요는 없다. 그저 풋풋한 청춘들의 ‘밀당(밀고 당기는)’ 수준에서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는 완성된 그림에 덧칠한 수채물감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토끼처럼 귀엽게 두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국연수와 무덤덤한 듯 신화적인 일상을 이어가는 최웅의 전지적인 느낌은 사실 이 드라마에서 그다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만화적 수준의 비주얼이 품어내는 매력은 사람들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끌고 올 수는 있다. 그런 부분이 드라마에 숨겨진 숙고할만한 삶에 대한 고찰을 왜곡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이면서도 그들의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다면 도대체 누가 이들의 삶을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을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도 해본다.


드라마의 개개인 캐릭터의 미세하고 세심한 배경의 명확성은 이 두 사람(최웅과 국연수)의 삶과 생활, 감정 변화와 선택에 있어 많은 역할을 한다. 이런 세세한 주변부의 설정이 이 드라마가 더욱 설득력 있고, 설사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부분에 대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또는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진행 상황에 힘을 더한다.


너무 어둡지 않게 표현되는 내면적인 감정이나 갈등은 행복한 성취로 이어질 여지를 남기는 적절한 설정이자 빌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악당(빌런)이 없는 이야기지만,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현실적인 설득력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다.


(#4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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