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세계에 살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산다
카메라는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을 떠나 ‘현재’라는 시점으로 점프한다.
먼저 카메라에 담긴 사람은 직장인이 된 국연수다. 국연수는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한 삶은 이게 아닌데…’라는 속마음을 되뇌며 나타난다.
이후 국연수의 대사를 통해 ‘현재’라는 시점이 그들이 다큐멘터리 촬영을 했던 고3이던 2011에서 10년이 흐른 뒤인 2021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2011년에 고등학교 3학년이었으므로 두 사람이 1993년생이라는 점도 유추해 볼 수 있고, 현재 시점의 두 사람은 29세의 성인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국연수는 까칠한 장도율 팀장을 상대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그녀의 표현대로 ‘개무시’를 당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로 끝내 설득해 낸다. 문제는 이 아이디어 안에 ‘고오 작가’라는 그림을 그리는 신비주의 작가가 있다는 부분이 문제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이 신비주의 작가를 섭외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는데, 문제는 그 작가가 바로 최웅이라는 점이고 국연수는 아직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
현대의 한국 사회는 예의나 도덕 따위보다 무조건 능률을 따지고 결과를 우선시한다. 그러한 관념은 국연수와 장도율의 신경전에서도 드러나는데,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중간에 툭툭 끊으며 자기 말을 앞세운다. 특히 장도율이라는 인물은 뻔한 부분은 빠르게 생략하고 오직 핵심적인 부분만 들으려 하고, 상대방의 과정보다 자기에게 필요한 말만 듣고 싶어 한다. 더 문제는 그런 방식의 일 처리를 프로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냉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자신의 색깔이라고 자부한다는 점이다.
주차장에서 만난 장도율의 모습은 국연수와는 성격적 도플갱어 수준이다. 장도율은 ‘나는 책임감 없는 사람을 제일 한심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냉정한 말투로 국연수를 압박한다. 이 말은 국연수가 최웅을 향해 직격 했던 가장 공격적인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별생각 없이 흘려들을 수 있을 정도로 당연하고 옳은 말 같지만, 어떤 이익이 되는 선택권, 즉 기득권을 손에 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이 사회가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적·기능적 위주의 계층적 구조 안에서 차별되고 계급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즉 그 내용의 옳고 그름보다는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총알처럼 외부로 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 전교 1등의 현재와 전교 꼴등의 현재는 아직 밝히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 숨은 이야기를 타고 현시점으로 모아지면서, 우연 같으면서 필연적인 상황으로 이끄는 건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재미와 흥미를 기대하게 만드는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그해 우리는>의 이러한 전개는 매우 흥미로웠다.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산다’라는 건 객관적으로 볼 때와는 달리 그 격차 속 당사자들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같은 사회, 같은 시간대, 비슷한 공간에 살면서도 주관적이든, 사회적이든 격차를 좁히기 어려운 게 첫 번째 핵심으로 자리한다. 게다가 성별도 다르고, 환경이 다르며, 가치관이 다르다면… 도저히 가까워지기 힘든 모든 설정이 마련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최웅과 국연수는 바로 그런 청춘들이다.
치열해 보이는 국연수의 현재를 떠나 카메라는 이번에는 최웅의 현재를 비춘다. 최웅은 부모님의 문어발식 먹거리 사업 확장으로 인해 충분히 여유 있는 여건에서 빈둥거리며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최웅은 부모님의 사업과는 완벽하게 떨어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거기에서 경제적인 생계를 성공적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사실 최웅이라는 캐릭터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빈둥거리는 패배자로서 ‘꼴찌’가 아니다. 그 복선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성적은 전교 꼴찌지만, 늘 학교 도서관 독서왕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최웅과는 예인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 사이이며 현재는 SBC 방송국 PD로 일하고 있는 ‘김지웅’이 웅이네 먹거리 사업 홍보 영상을 찍기 위해 웅이네 가게를 찾았다. 김지웅은 최웅과 국연수 사이에 끼어 있는 또 다른 주연급이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최웅과 국연수와는 조금 다르지만,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만 다른 세상을 사는’ 인물이다.
이름 끝 자 때문에 ‘웅아’라는 부름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던 어린 시절, 최웅에게 느껴야 했던 열등감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 좋은 최웅의 부모님들 덕분에 거의 느끼지 못했다. 최씨네 부부가 지웅을 친아들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뭐, 이 정도 성공을 거둔 사업가들이 과연 현실에서도 이처럼 천사표일 수 있을까 하는 모난 의문이 들긴 하지만, 드라마의 인물 설정에까지 왈가왈부하는 것은 월권일 것이기에 그 의문은 그냥 접기로 한다.
어쨌든 작품에서 최웅의 부모는 천사 그 이상인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김지웅이 탈선하지 않고 번듯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지웅의 어머니보다 오히려 최웅의 부모님들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김지웅 본인의 됨됨이가 중요하다. 김지웅은 자신의 비관적인 처지보다 최웅과의 우정을 선택했고,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힘들어하면서도 열등감으로 다가서기보다 순리적인 선택을 한다.
드라마의 전체적인 소개는 대충 이 정도의 설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 화의 절반 정도를 지날 무렵에 이런 파악이 모두 가능하다. 이렇게 드라마가 과거의 초기 설정과 현재에 대한 프롤로그를 쭉 풀어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드라마의 메시지는 강직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적인 빈부격차에 의한 일상의 차이를 드러내 보이면서도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 상황을 인지하고, 그 차이와 차별로 인해서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거부한다. 인물들은 각자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인 현실에서 감정선을 차분하게 내면화한다. 내면화 과정 역시 혼자서 어느 날 갑자기 깨우치는 판타지적 풀이가 아니라 가까운 친구와 이웃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하나씩 깨달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드라마를 높이 평가하는 데에는 바로 이런 지점이 있다.
인기 편승을 위한 센세이션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현재 일반의 반대편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반대 입장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수준의 개인적 선택으로써, 세상의 편견을 인정사정없이 뒤집어버리는 태도다.
그런데 가만히 또 생각해 보면, 이게 놀라운 것인가? 이게 새로워야 할 것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순수하고 신선한 봄바람과 같은 느낌! 이것이야말로 청춘의 특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다만 현재 일반이 너무 각박하다 보니 오히려 순박한 청춘들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인 판타지처럼 느끼지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국연수와 최웅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스스로 감정에 충실하다. 시간이 지난 것과 상관없이, 어린 시절에 잘 몰랐던 감정에 대해 스스로 차츰 솔직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굳이 ‘성장’이라는 단어 안에 함축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국연수와 최웅은 일반적이지 않은 행태를 취함으로써, 그 테두리를 벗어나고 있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철없던 시절에는 ‘자존심’이라는 단어로 덮을 수 있었겠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위한 자존심이라기보다 상대를 위한 ‘배려’와 ‘애정’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점을 짚은 것이다.
(#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