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연수의 페르소나
국연수의 페르소나국연수의 페르소나구
이 드라마의 원작은 웹툰이 아니다. 꼭 순정 만화적인 설정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웹툰을 원작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웹툰이 원작이 아니다.
이 작품을 쓴 작가가 이 드라마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따로 웹툰으로 제작한 것은 맞지만, 드라마와 웹툰이 동시에 진행됐다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드라마와 웹툰의 시간적 배경이 다른 점을 들어 설명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도 고교 시절의 이야기가 조금 나오긴 하지만, 단편적이다. 그래서 드라마를 좀 더 이해하고 재미있게 시청하기 위해서는 웹툰을 먼저 보고 드라마를 이어 보면 좋다.
인터넷에 올려진 웹툰이나 또는 책으로 발간된 단행본과 드라마 원본은 모두 동시에 이루어졌다. 아주 특이한 케이스이긴 해도 막상 작품을 다 보고 이해한 상태에서 말하자면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캐릭터에 대해 덧붙이자면, 콧대 높은 국연수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술을 먹고 늦게 돌아온 날, 손녀를 기다리다가 먼저 잠들어 있는 할머니와 나란히 누우며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를 내 인형으로 만들고 싶다. 매일 쪼물락 거리게…”
과도하다 싶을 만큼 애정이 넘쳐난다.
밖에서는 초강력 멘털을 자랑하는 유능한 국연수 팀장의 집. 건축학적인 집이 아니라 가족, 가정의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즉 국연수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그런 것이다.
요즘은 부모 단계도 이해가 어려운데, 그녀는 할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의지 정도가 아니라 그녀가 던지는 대사들을 보면 할머니를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떠날 수 없는 둥지라고나 할까. 성격 까칠한 거의 욕쟁이 할머니인 연수의 할머니는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을 이어받은 연수를 무척 걱정한다.
까칠함은 현대의 사회생활에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그녀 할머니의 과거 이야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당차게 외치는 이유를 들어보면, 현실 사회에 덧대어 충분히 이해되기도 한다. 세상에 오직 늙은 할머니와 어린 손녀딸 둘만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할머니가 연수에게 가르치는 까칠함은 부족하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할머니가 연수의 연인으로 나타난 최웅을 대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다. 그건 성격이고, 태생적인 내력이다.
웹툰도 그렇고 드라마에서도 살짝 내비치지만 국연수가 주변 사람들과 친분을 쌓지 못하는 이유를 그녀의 가난에 비중을 둔다. 가난한 것이 죄가 아님에도 가난하다는 것이 죄인처럼 취급되는 사회다 보니, 뭔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이해되는 게 씁쓸하다. 아무튼 그런 가난은 자존감 강한 사람에게는 때로는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사실 두려움에서 비롯된 이런 자기 방어적인 태도와 성격은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만연하다.
문제는 이런 원인들에 의해 가끔 진실하고 솔직한 접근마저 차단당한다는 데 있다. 최웅과 국연수의 이별은 바로 그런 원인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 기저에는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현실을 부각하며 보여주고는 있지만, 연수의 결정에 있어 최종적인 이유는 결코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국연수라는 캐릭터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하고 일반적인 이미지다. 그녀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 스타일이지만, 정작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사회에서 만나는 타인에게는 철벽녀처럼 완벽함을 보이지만, 그녀 내면에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소녀가 있다.
국연수가 최웅과 이별하는 장면에서 말하는 “내가 버릴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라는 말에서 보여주듯이, 그녀는 스스로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가난을 패배 의식처럼 가지고 있다.
이미 패배 의식에 절어있는 사람이 희망하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 꿈과 현실은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하는 노력과 경쟁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사실 잘 모른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경쟁, 성공에 대한 욕구, 경제적 부유함이 다른 모든 것을 구제할 수 있다는 신념에 차 있다.
그녀가 성공이라고 믿고 달린 방향은 애초에 끝없는 경쟁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도 가난이지만 하필이면 최웅을 거부하게 되는 순간에 들이닥친 경제적 문제는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면서 국연수라는 캐릭터의 어리석음에 대한 허무맹랑한 이유로 전락한다. 또한 그녀가 생각하는 ‘경제적 부유함이 곧 성공이다’라는 공식은 생각하면서 최종 목적인 ‘행복’과 연결하는 데 있어 계획성이 없다. 늙은 할머니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자아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그녀가 꿈꾸는 부유함이 곧 행복일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것은 그녀 삶의 정당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경제적 사정이나 현실적인 여러 가지 처지를 떠나서 최웅에게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따지고 보면 사실 진짜 열등감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최웅을 만나는 시점,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을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최웅의 툭툭 던지는 말에 의해서 자각하기 시작하면서다.
국연수는 전교 1등이고 최웅은 전교 꼴찌이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최웅이 열등감을 가져야 할 것이고, 왠지 모를 주눅이 들 것으로 예상하는 게 맞다. 그런데 국연수와 최웅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느낌은 국연수에게서 더욱 드러난다. 좇기는 자의 초조함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국연수가 우등생이라서 최웅에게 앞서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설명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미세한 지점을 찾아 작가는 국연수의 탈출구를 열어놓는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면서 먼저 사과하려는 모습을 통해,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쳐갈 수 있는, 개선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을 향해 쓰고 있던 허위의 가면을 벗고 최웅에게 다가서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아마도 소녀가 숙녀로 성장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에 영원한 승리자가 없듯이 영원한 패배자는 결코 없는 것이다. 사실 삶에 있어서 승리와 패배를 가르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개인적인 성취감? 만족감? 그것은 주관적인 감성이라고 말한다 해도 항상 상대적인 대인 관계 안에 얽혀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상대적인 우월감이란 하잘 쓸데없는 헛된 것이며 그 실체조차 사실은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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