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똑같지만 모두에게 다른 삶의 의미
이쯤에서 본격적으로 애정과 빈부에 대한 문제를 거론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신데렐라 신드롬’이라 불리는 가난한 여성이 ‘왕자’를 만나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을 이루는 얘기를 많이 접해왔다. 어린 시절에 나 역시 그런 이야기를 보며 감동하고, 안심하고, 격려하고, 뿌듯하기까지 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뭔가 하나둘 알아가면서 이것이 파렴치하고 잘못된 방식임을 깨달으며 절망하기도 했다.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처럼.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사회적 계층 구조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행복이 사회적 구조와 만났을 때, 복잡한 정치적 방식이 아니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면, 때로는 뭔가 더 알게 된다는 건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감동에 휩싸인 동심을 그럴듯한 논리로 차갑게 후벼 파는 행위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굳게 믿었던 정의나 평등, 자유 같은 개념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그러나 누구나 성장하고, 누구나 어른이 되며, 누구나 늙고, 누구나 결국에는 죽는다. 그 과정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우고 익히는 모든 지식이 썩 달갑지 않게 다가오는 그런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어떤 어른이 되는지, 어떻게 늙어가는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에 따라 삶의 의미는 달라진다.
그런데도 시간의 흐름 안에서 보면, 그것은 단순히 동심 파괴 행위라기보다는 깨우침에 가깝다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물론 아직 꿈에, 환상에, 상상에 행복해하는 어린아이에게 다가가 일부러 그것을 깨부술 이유는 없다. 그건 잔인한 행위다. 그렇지만 빠른 시간의 흐름 안에서, 또는 어린 시절부터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에 노출되고, 정보에 노출되면서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알 건 알고, 깨우칠 건 깨우치게 되는 요즘 상황에서는 감정이나 감성에 젖어 아이라고 무작정 보호 울타리 안에 가두고 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것이 바로 경제적 여건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21세기에 막 들어선 지금, 가족 개념의 빠른 파괴 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빈부격차’.
태어나면서부터 자격이나 권리가 정해지는 웃기는 상황. 사람 자체를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이 걸친 것들로 사람을 판단하는 시선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이라는 운명을 단번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기와 같은 범죄가 되었든 권력을 움켜쥐고 합법처럼 보이는 갈취를 하든,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하고, 내가 가진 상황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권과 이득을 챙기려 한다.
구덩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처럼, 아이이고 여자고 간에 내 가족만 아니라면 무차별로 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구덩이 윗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교육의 장으로 내 아이를 밀어 넣어야 하고, 학벌과 인맥이라는 고질적인 병폐를 고치기보다는 거기에 합류해 귀족이 되는 쪽은 선택하려 한다.
보통은 내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아니다. 실체는 내 아이가 잘되어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면 부모인 나 역시 편안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욕구가 더 강한 이기적인 욕심이 깔려있다는 것이 솔직한 답이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경제적 차별이 당연해지고, 점차 인간성을 잃어가도 그 자신은 알지 못한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각박해져 가는 이유다.
세상 모든 부모 중에 자식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아! 세상이 하도 이상하게 변하다 보니, 원래는 이렇게 얘기하면 세상 사람 100이면 100 모두 수긍하는 게 옳겠지만, 사실 지금은 100이라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도 많고, 자기 자식을 폭행하는 짐승 같은 인간도 있으니까.
그 이유야 어찌 됐든 간에 친자식을 낳자마자 버리거나 팔아치우는 부모도 있는 세상이다 보니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보편성에 의지해 얘기해야만 한다는 현실이 오히려 정해진 스펙트럼 안에서 담론화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편한 생각도 든다.
사회생활이나 직업, 가정생활이나 삶의 질, 가족 간 발생하는 권력 계층적 구조, 급여, 보건, 위생, 하다못해 건강에 대한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우리는 잔인하다 못해 그 이상의 어떤 단어가 있다면, 그 최상의 단계를 의미하는 단어를 갖다 붙여야 할 상황에 놓인 채 살아가고 있다.
극단의 개념을 말한다고 해서 몸서리치는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이 생각하는 개념이란 살짝 달리 마음먹기에 따라서 절망적인 암흑도 봄에 피어난 한들거리는 꽃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빛과 어둠이 극명하지만 한 치의 차이이듯이, 세상 삶에 있어 모든 것은 그보다도 작은 차이 안에서 발버둥 치는, 아주 작은, 너무나 미세한, 정말 거의 차이 없는 차이에 대한 어리석은 주장이다. 문제는 차이의 크기와 상관없이 ‘나’ 이외의 세상에 대해 모두가 관심 자체가 없다는 데 있다.
조금 길게 풀어낸 참혹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사랑’을 얘기하고자 한다. 고교 시절이나 청춘을 지나며 느꼈던, 아무런 조건도 없는, 차별이나 경쟁이 없는, 그 실체를 명확하게 설명조차 할 수 없지만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것!
드라마 <그해 우리는>에서 가치 있는 가장 큰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차이와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커다란 간극 앞에서 담담히 원하는 사랑을 실천하고 찾아가는 것이다. 아프고 병들고 상처 투성이인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저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넘어 우리 모두의 관계 설정에 있어 치유제로서의 그것!
버려졌던 최웅의 상처도, 길을 잃었던 국연수의 방황도, 외로움에 떨던 김지웅의 아픔도... 애정에 의해 치유되고, 그 과정 자체는 비록 멀리서 바라보면 또다른 갈등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애정은 방황하는 영혼에게 결국에는 항상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한다.
즉, 어떤 상처가 되었든 그 치료제로 가져야 할 것이 바로 ‘애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을 상처주는 것은 사람이고,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사람이다.
(#6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