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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은성 Oct 29. 2020

뒤틀린 승자

생각해보면 넌 자격지심 덩어리였던 것 같아

며칠 전, 나는 무턱대고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전화상으로 내가 토로하는 삶에 대한 괴로움을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는, 그녀 특유의 단조로운 말투로,
 
 “그렇게 힘들면 우리 집에 와 있어. 혼자서 괴로워하지 말고.”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핑계 삼아 나는 다소 뻔뻔스럽게 그녀의 집에서 이 주일 가량 머물렀다. 아니다, 나는 사실 나 스스로가 뻔뻔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녀라면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많이 가진 사람이니까 거기에 나의 뻔뻔스러움 하나 정도 추가한다고 해서 뭐가 그리 달라질까, 했다.


그녀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것. 그녀는 좋은 부모를 가졌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화목함이라는 온실에서 화초처럼 자랐다. 든든한 뒷배경이 있어서였을까, 그녀는 회사 생활을 몇 년 하다 관두고 작가 생활을 하겠다고 집에 폭탄선언을 했고, 그 후로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작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직 등단하지 못했으니 어찌 보면 볼 품 없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다른 말로는 팔자 좋은 백수라는 뜻도 된다. 그녀가 팔자 좋은 백수이기만 하면 나는 괜찮았을 것이다. 그녀는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남산과 남산타워가 훤히 보이는 방 세 개짜리 집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물질적 지원을 받는 부유한 백수. 부모 잘 만나 별 걱정 없이 사는 계집애. 그리하여 나는 그녀의 집으로 비집고 들어간 것이었다.

그렇게 들어간 그녀의 집. 그 집에서 나는 내 집처럼 굴었다.
 그녀가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베란다에서 줄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그녀는 나에게 ‘담배 연기가 싫으니 담배 안 피우면 안 돼?’라고 한마디 할 법도 했을 텐데, ‘이웃들이 담배 냄새를 싫어하니까 조금만 조심해 줘.’라고 말했다. 아마 그녀 성격상 배려해서 돌려 말한 것이겠지. 그게 이유 없이 거슬렸다. 그래서 나는,


“아, 나에게 있어서 담배 태우는 재미까지 뺏진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라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녀에게 보란 듯이 담배를 입에 물고 베란다로 향하는 나를 그녀는 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부지런히 집안일을 했다. 청소, 걸레질, 빨래, 설거지 등으로 분주한 그녀를 난 도와주지 않았다. 그저 지켜봤을 뿐. 내 시선을 느껴서였을까. 그녀는,


 “넌 이곳에 온 손님이니까 집안일하지 않아도 돼.”


 라며 예의 바르게 웃어 보였다.

집안일을 하는 그녀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나는 그녀의 집안 곳곳에 놓인 가족사진,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 착하고 순한 그녀, 그래서 좋은 친구가 많은 그녀. 나와 달랐다. 나는 친구가 그녀밖에 없었다.

날 받아줄 친구가 그녀뿐이라서, 내 삶의 괴로움을 핑계로 그녀의 집에 있는 동안 매일 술 파티를 열었다. 그러며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주로 내가 많은 말을 했고 그녀는 가만히 듣기만 하였다.

그녀는 긍정적인 삶, 우정, 사랑, 행복과 같은 돈으로 전환되지 않는, 정해진 정답이 없는, 시간 낭비적인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뜬구름 잡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가장 즐겨했던 그녀. 부모로부터 금전적이든 정서적이든 철저하게 보호받은 채로 성장해 세상의 잔인함을 모르는, 철없는 계집애가 좋아할 만한 주제였다.
 그래서 나는 부러 그런 대화를 하지 않았다. 삶의 잔인함에 대해, 사랑의 처참함에 대해, 나의 못생김에 대해, 나의 가난함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나를 위로하려 애를 썼다. 그 모습이 처절해 보였고, 왠지 모르게 나는 승자가 된 기분이었다.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났어. 글쎄, 사귀고 싶다는 말은 안 하고 내 몸만 탐하지 뭐야. 그래서 그냥 잠만 잤어. 근데 나는 내가 쓸모없는 여자여서 당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사귀기에는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봐. 정말 그래?”


나의 자조적인 말에 그녀는 나에게 두었던 시선을 움직여 거실 모퉁이에 두었고,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한 그녀의 반응을 나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로 화제를 나의 처참한 가족으로 돌렸다.


“나는 매일 부모에게 빚을 지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


실제로도 그러했다.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아빠는 일을 하다 크게 다쳐 장애를 얻었고, 백수가 되어버렸다. 그 후 버러지처럼 우리 집에서 기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엄마였다. 엄마는 식당에서 일을 하며 한 달에 20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돈을 알뜰살뜰하게 모아 나에게 큰돈을 마련해 주었다. 그 돈의 액수를 보면서 감사함을 느끼기보단 ‘부채’를 먼저 느꼈다. 엄마가 이 돈을 어떻게 모았을지 뻔히 보였으니까.


“그럼 나는 어떻겠니, 나는 지금 돈 안 되는 작가 생활하겠다고 이러고 있는데.”


그녀는 시선은 여전히 거실 모퉁이에 있었고,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입으로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과 상반된 다정한 말투에 순간 부아가 치밀어 오른 나는,
 
 “나는 그런 말이 제일 싫어! 네가 내 삶에 대해서 뭘 아는데? 우리 엄마가 그 돈을 어떻게 모았고, 그 과정을 뻔히 아는 내가 어떤 심정으로 받았는지 알기나 해?”
 
 라고 빽, 소리를 질렀다.

나의 비명에 그녀의 시선은 다시 나에게 꽂혔고,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녀의 집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한참 날 들여다보던 그녀는,
 
 

“미안해. 내가 너무 내 입장에서 이야기했네. 함부로 이해한다고 하지 않을게. 네가 하고 싶은 말 다 해. 그냥 듣고 있을게.”


라고 말했다. 그 말에 그녀 특유의 여유로부터 오는 다정함을 철저하게 부숴버리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의 집에서 예의 없이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녀의 침대를 차지한 채로 대자로 뻗어서 잠을 잤다. 그녀는 멍청하게도 나에게 비켜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소파에서 혹은 거실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내가 사놓고 입지 않는 옷을 선물이랍시고 줬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받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분명 고맙다고 말하며 그녀는 웃었는데, 그녀의 표정이 내 마음속에서 서걱거리는 소리로 치환되어 느껴졌다.


사실,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이쁘고,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했고, 집안도 부유하고, 친구도 많고, 좋은 애인을 둔 그녀가. 그래서 나는 ‘친구’라는 위치를 이용해 그녀 위에 군림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그녀를 내 기분 내키는 대로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도 나를 받아주기 지친 건지 점차적으로 반응이 사라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봐, 날 다 받아줄 수 있을 것처럼 굴던 너도 내가 버겁잖아.’
 
 

질투심이 똘똘 뭉쳐 만들어진 괴물의 절규에 가까웠던 이 삐뚤어진 폭주는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고, 마침내 그녀의 포기한 듯한 표정을 기어코 본 후에야 나는,
 
 “나 집에 돌아갈래.”
 
 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당일, 그녀는 날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해 줬고, 난 그런 그녀에게 손을 흔들면서 버스를 탔다. ‘너는 나보다 많은 걸 가졌지만, 너와 나 사이에서는 내가 승자야.’라고 생각하며 창문 밖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나의 마음을 진즉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차가운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처음으로 본 그녀의 차가운 시선. 그것이 마음에 쿵, 하고 박혔다. 그 시선이 이제 우리는 끝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자격지심이라는 이름의 괴물을 뒤집어쓴 채로, 수년간 친구로 지냈던 이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 관계에서 뒤틀린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 관계 속에서 이긴 것인지 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로부터 유기된 건 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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