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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은성 Nov 23. 2020

2015.12.23

약 5년 전의 글

어렸을 때 나는, 모범생인 가족들 틈에서 내가 자유분방하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다른 것들을 할 시간에 공부에 집중했고, 나처럼 아름다움이나 그림, 음악, 글과 같은 삶의 부수적인 것들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다들 선생님이 시킨 대로 열심히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런 삶이 재미없었다. 시킨 대로 살고 싶지 않았고, 나에게 흥미 없는 공부도 성적을 잘 내기 위해서 버티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는 모범생들 틈 속에서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분출해야만 했고, 공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면서 살았다. 가족들에게조차 “너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야.”라는 소리를 밥 먹듯이 들으며.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나의 성격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계기였다.


내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미술을 목숨 걸고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언젠가, 만화책을 몰래 보던 나에게 화가 나신 아버지가, “너 이렇게 몰래몰래 만화책을 볼 거면 그림이나 그려!”라고 홧김에 하신 말에, “그래요, 원하는 대로 해드리지요.”라고 반항심에 답변한 것이 10년 동안이나 이 바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반항심을 버리고 “아버지 잘못했어요, 시킨 대로 공부할게요.”라고 말을 했더라면, 혹은 “만화책은 그냥 취미생활일 뿐이에요.”라고 말했더라면 나의 인생은 아마 180도로 변해있었을지도 모른다.


무튼, 입시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쉽게 패스했다. 발상과 표현이라는 디자인 대학 입시에서 수채화의 색감이 더 예쁘다는 이유로 고 3이 돼서야 갑자기 전공을 옮기는 고비를 넘겼지만, 나는 나 스스로도 내가 파스텔과 콩테보다는 수채화에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종위 위에 깔끔한 선으로 대상을 그리는 것보다는 묘사를 해가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는 4년 동안은 완전히 내 세상이었다.


다양한 기법을 배워야 했지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성적은 무난히 받았고, 종이와 연필로 그리는 그림으로도 성적을 잘 받았다. 다양한 기법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라고 했지만, 결론적으로 성적이 잘 나오는 흔히 교수들이 좋아하는 작업은 캔버스 위의 잘 묘사된 유화였고 나는 그걸 비교적 잘 맞춰주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좋은 성적을 받았던 건 아니지만, 무난하게 졸업했다. 이렇게 4년 동안 대한민국 미술대학에서 내가 배운 건, 나는 그림으로는 재능이 없다는 사실.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 그림에 조언해주는 것을 좋아하고 그 사람이 조언을 받아들여 더 나은 그림을 그려내면 행복해하는 것.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또라이가 하는 소리 같겠지만, 4년 동안 2천만 원가량의 등록금을 써 부으면서 알아낸 것이 이 두 가지면 나는 충분했다.


졸업 후 나는 다양한 일을 시도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미대 졸업자의 삶이 그러하듯, 그림이 아닌 글로 취업을 해보려고 했다가 때려치웠고, 사진기도 손에 잡았다가, 가족들 전부 다 어이없어할 만큼 미술계 통과 전혀 상관없는 생뚱맞은 길로 가려고 했다. 이렇게 청춘의 황금기를 2년 동안 쓰면서 알아낸 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해서, 나는 영국으로 왔다. 그토록 노래 부르던 미국이 아닌 영국으로.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공부는 해야겠고, 그림이 좋긴 한데 어떤 분야가 좋은지 통 모르겠으니까, 일단 파운데이션 코스가 있는 영국으로 가자. 1년을 하다 보면 알겠지, 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나름대로 체계적인 계획을 세웠고 부모님에게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후 2013년, 영국으로 왔다. 그리고 파운데이션 기간을 하는 동안 깨달은 건, 난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또 나는 한국의 교육과정을 잘 밟은 ‘만들어진’ 미술학도라는 사실. 이 것에 대해서 더 깊은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내가 가고 싶어 했던 대학들로부터 오퍼가 왔고, 일 년의 시기 동안 쭉 했던 ‘내가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잘 따라간 정형화된 사람인 것 같다.’는 고민은 한편에 잘 숨겨놓은 채로 26살에 또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1년은 어찌 잘 흘러갔다. 파운데이션과 대학 시스템은 어떻게 다른 지도 알아봐야 했고, 2학년 성적은 들어가지 않으니까, 라는 생각도 있었다. 성적이 생각보다 잘 나오진 않았지만 그것이 미술을 포기하고 싶다, 는 생각으로 연결되진 않았다.


하지만 역시, 고민은 미리미리 해결했었어야 했다. 한편에 잘 숨겨놓았던 고민이 곪아 터지기 시작했으니.


2015년 9월, 3학년 1학기가 시작한 이후로 나는 매번 울었어야 했다. ‘있어 보이는 주제로부터 시작’, ‘잘 만들어야 한다.’, ‘제대로 된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라는 틀에 갇혀 있어 시작조차 두려워하는 나와 달리 다른 아이들은 일단 아무거나 쥐고 드로잉을 하며 자신의 주제를 잡아 주얼리 작업을 시작했고 결과물이 놀라울 만큼 멋졌다. 본인들의 작업에 자신 있어하는 그 아이들과 달리 나는 나 스스로에게도 자신이 없었고, 이게 맞나, 저게 맞나 눈치를 보기도 했다. 교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다른 방향으로 틀어보기도 하고, 아 이게 아니구나. 다시 돌아오는 작업을 몇 번이고 거쳐야 했다.
‘드로잉 재료가 왜 종이와 연필밖에 없어?’ ‘드로잉이 잘 그려지기만 하면 뭐해, 너무 평평해!’, ‘너무 한 재료에만 매달리지 마!’라는 교수님의 크리틱을 쿨하게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내 작업에 대해 자신감이 있지 않았고, 나 스스로에 대해 믿음도 없었다.
나 스스로 믿었던 ‘난 자유로운 영혼이야.’라는 생각도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잘 만들어진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모가 있었기 때문에 통통 튈 수 있었음을, 이 모를 더 깎고 깎아 한국 사회에 잘 녹아들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술을 하질 말걸, 내가 왜 예술에 감각이 있었다고 나 스스로 확신을 했던 것일까. 수없이 나 스스로 '이렇게 재능이 없으면서, 뭘 믿고 재능이 있다고 믿어왔니?' 다그쳤다.


내 작업을 발표할 때마다 느껴지는 언어적인 한계도 나를 지치는데 한몫했다. 18개의 파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볼 때면, 나는 내가 뭘 만들었는지조차 잊어버릴 만큼 머리가 텅 비기도 했다. 내 작업에 대해서 할 말을 준비했는데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몰려 당황하기 시작하면 할 말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때는, 교수님으로부터 ‘본인이 준비한 작업에 대해서 발표를 잘할 것.’이라는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영어 공부하지 못했던 현실이 억울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이번 학기를 버텼다. 도저히 안 되겠다, 능력도 없는 내가 무슨 석. 박사를 하겠다고 이러나, 학사 학위 받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가야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버티나 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진이 다 빠져서 침대 위에 쓰러져서 저녁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로 잠든 적도 많았다. 포기하고 싶었다. 이대로 돌아가도 부모님이 반겨주실 텐데. 눈을 감으면 한국에 두고 온 사람들이 떠올라서, 마음이 쓰렸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졸업장을 받기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해서 영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친구로부터 작업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물어봤고, 한국에서 배웠던 라이노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계속해서 최상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 노력했다. ‘잘해야겠다.’라는 생각을 버리고 ‘일단 완성이라도 하자.’로, ‘나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아침 10시쯤 도착해서 점심도 거른 채로 밤 9시까지 꼼짝하지 않고 작업실에 처박혀있기도 했고, 연필과 수채화로 하는 드로잉은 ‘난 이게 좋다. 이게 내 캐릭터다.’라고 말할 수 있는 뻔뻔함도 키웠다. 그리고 그냥 ‘내 스타일’대로 작업을 계속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니 어느 순간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계속 작업을 할 생각이라면 체력을 잘 길러야 해.’라고 조언해주셨던 선배도 떠올랐다.

죽겠다, 작업 마음에 든다, 죽겠다, 작업 마음에 든다, 으악 나 죽는다.라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12월 3일이 됐고, LMT EDITION 전시를 했고 하루하루 울었던 내 마음도 다시 진정이 되었다.
마음으로 낳은 주얼리가 하나 둘 팔리는 걸 보면서 행복해하기도, 쓸쓸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도 나도 만족할만한 주얼리를 만들었다는 희열감도 느꼈다. 팔린 13개의 작업들로부터 ‘주얼리가 너무 아름답네요.’ ‘언니가 서양화의 바탕이 있어서 그런지 언니 주얼리는 조형미가 있어요.’라는 칭찬으로부터 한 학기 너무나 힘들었던 마음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 학기가 끝나자마자 3학년 1학기 동안 계속해서 했던 ‘내가 정형화된 사람이다.’, ‘나는 미술에 소질이 없다.’는 고민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바보처럼 또다시 석. 박사를 꿈꾸기 시작했다. 어쩌면 다음 학기도 똑같이 ‘나는 재능이 없어.’, ‘미술을 그만두어야지.’ ‘내가 계속해서 버틸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또 휩싸일 테고, 다른 학생들의 작업과 나의 작업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나는 왜 이렇게밖에 못하는 걸까 서러워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표현하고, 형상화하는 것에 대해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아니까.
한 우물을 꾸준히 파야 뭐라도 될 테고, 나 또한 이 우물을 꾸준히 파다 보면 그래도 이 분야에 대해서는 그토록 되고 싶어 했어 했던 ‘전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마치는 고민.


       

이번 학기 하루하루 버텼던 것처럼, 그리하여 결과가 좋았던 것처럼
버티는 삶이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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