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후은성 Dec 21. 2020

너에게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이별을 선물해주고 싶었어

안녕. 너와 연애를 시작했었던 겨울이다. 그리고 너와 헤어진 지도 생각해보니까 꽤 됐네.

우리의 관계는 철저하게 내가 먼저 시작했어.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너는 여기저기 여지를 뿌리며 다녔던 것 같아. 너랑 사귀고 있을 당시에 너를 아는 내 지인이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거든. 네가 나뿐만이 아닌 다른 여자들도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말을 웃으면서 적당히 무시했어. 내가 확인한 게 아니라서.


그 뒤로도 너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의 회사 동료가 네가 여자들에게 커피 이모티콘을 뿌리고, SNS에 섹시한 사진들을 올려둔 여자들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낸 걸 본 적 있다고 말해줬거든. 우리는 비밀 연애를 했으니까 주변 사람들이 우리가 연인인 줄 모르고 내게 했던 뒷담화겠지. 그런 것들도 전부 넘겼어. 네 핸드폰의 팝업창으로 뜬 소개팅 어플 알람도 봤었고, 그것에 대해서 내가 한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넌 펄펄 날뛰면서 아니라고 했었지. 일단 연인이 되면 무조건적으로 믿는 내 성격상 그냥 네 말을 믿기로 했고, 나는 잠자코 내 마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사실 나는 너와의 관계에서 끝은 무조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우리의 끝은 철저하게 내가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했지. 내가 너를 향한 감정이 식어버렸을 때.


너는 내 예상을 빗나가질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너는 내 믿음을 하나둘씩 꺼트려갔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네가 나에게 거짓말하고 다른 여자랑 같이 데이트하고 멍청하게 사진을 남겨놨을 때. 그때 나는 널 포기했고, 널 놓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너에게 가장 잔인한 이별을 선물하겠다고 다짐했지.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너에게 잘해줬어. 네가 불행해지기를 바라면서. 너처럼 세상을 홀로 헤쳐나가는 사람은 타인의 무조건적인 다정함에 결국 속수무책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나는 너에게 전적으로 잘해줬어. 너에게 투정조차 한번 하지 않았다. 짜증 한번 내지 않았어. 그리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지. 너의 이해되지 않는 태도 앞에선 너에게 싫은 소리 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가끔은 널 감당하는 게 버거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그렇게 무정한 다정함으로 널 대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는 네가 귀찮아졌고, 내가 널 귀찮은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네가 나에게 매달렸지. 어느 순간부터 너는 나에게 자꾸만 시간을 내려고 했고, 나는 웃으면서,


"왜? 나 힘든데. 너도 힘들 텐데 쉬어."


라고 말했다.

그렇게 너와 행복하지 않은 연애를 6개월 동안 끌었지. 사실 우리는 사귀는 동안에도 연인이 맞긴 한 건지 의심이 들만큼 데이트를 안 했잖아. 억지로 만나면 서로 핸드폰 하기 바빴고. 헤어지기 직전 너와의 데이트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는 날 보면서,


"핸드폰 보지 말고 나랑 대화하면 안 돼?"


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나는 그 무수한 시간 동안 너와 이렇게 데이트하는 게 익숙해졌는데, 갑자기 나와 할 말이라도 생긴 거야?"


라고 상냥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짓을 반복하다 마침내 내 감정은 끝이 났고, '드디어' 내 입에서는 헤어지자, 라는 말이 나왔다.


너는 근 2달간 나를 잡았지. 네가 나를 잡기 위해서 한 개소리는 참 많은데, 아직도 기억나는 말 하나.


"나는 원래 혼자 잘 살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둘이 함께 있는 것에 대한 가치를 다 가르쳐놓고선 이제 와서 나 혼자 세상에 던져두고 도망가면 어떡해?"


그 말에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있잖아, 내가 너의 성벽을 부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 손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터지면서도 도끼를 들고 성벽을 깨부쉈거든? 그래도 네 성벽 안에 적어도 초가집 정도의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하겠지,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벽을 깨부수느라 지쳤을 무렵 겨우겨우 깨트린 성벽의 안을 확인해봤는데 폐허뿐이더라. 깜짝 놀라서 네 폐허의 잔재를 확인해봤어. 근데 잔재들도 재활용이 불가능하더라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가치 없는 것들 뿐이라니. 그러니까 내가 도망칠 수밖에 없잖아."


이렇게 말하는 너는 나를 원망했다.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 놓고 떠나면 나 보고는 어쩌라고?"


그래서 나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네가 힘든 순간엔 늘 내가 네 곁에 있었는데, 정작 내가 힘든 순간엔 넌 어디 있었는데?"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꾸만 나에게 널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넌 앞으로 나처럼 너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사람을 만나긴 어려울 거야. 그리고 나같이 좋은 사람도 만나기 어렵겠지. 넌 나를 이렇게 놓친 것을 평생 후회할거고. 이게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잔인한 복수야.


그렇게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던 네 인생에 널 버려두고 나만 홀로 도망쳤다. 그리고 네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졌지. 시간이 흘러 너와의 관계를 떠올려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와 헤어진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너에게 헤어지자,라고 말하자마자 해방감이 느껴졌으니 말 다했지.


이 것 하나는 너에게 미안하다.

생각해보면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은 사랑이 아니라 측은지심이었다는 것. 널 불쌍히 여긴 내가 네가 홀로 걷고 있을 긴 터널을 함께 걸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널 대했던 거. 이성으로서의 애정이 아니라, 그저 불쌍한 이를 향한 마음이었던 것. 그리고 너의 터널을 함께 걷다 지친 내가 너 혼자 그 터널에 버려두고 빠져나온 것. 사실 그 시기에 나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던 시기고, 어떻게서든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어. 그래서 내가 널 네 인생으로부터 조금이라도 '구원'해주려 노력하며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아.


수개월이 흐른 후 우연히 너의 SNS를 봤는데, 너는 나에 대한 그리움 속에 머물러 있더라.

그래, 이건 가끔 궁금해. 그게 너를 향한 내 복수였다는 것을 너는 알았을까 몰랐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연극은 막이 내리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